근* 글

<대일산필> 휘파람-김근혜

테오리아2 2014. 1. 30. 22:25
728x90

 

휘파람

 

 

준이는 휘파람을 곧잘 불었다. 방천을 거닐 때나 나를 불러낼 때도 휘파람을 불었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내가 보고 싶을 때, 휘파람을 불면 시원해진다고 했다. 나도 그가 보고 싶을 때는, 볼일이라도 있는 양 그의 집 앞을 서성거렸다. 우연이라도 마주치고 싶어서였다. 만나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손도 잡지 못했다. 그는 휘파람을 불고 나는 돌을 만지작거리거나 발만 꼼지락거리다 돌아오는 게 전부였다.

학교 가는 길은 방천 둑길과 논두렁길이 있었다. 나는 논두렁길로 가고 그는 방천으로 다녔다. 우린 어쩌다 마주친 등교 시간을 약속이나 한 듯, 그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섰다. 그렇게라도 보지 않으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막상 만나면 쿵쾅거리던 마음과는 달리 시침을 뚝 떼고 서로 영어 단어장만 보고 걸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한참 이성에 눈뜰 무렵이던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같은 동네에 살아도 남녀가 가까이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마주쳐도 모른 체하고 다녔다. 짓궂은 아이가 장난을 친 것이 우리가 만나게 된 계기였다. 두 장의 연애편지를 써서 그에게는 내가 줬다고 하고, 나한테는 그가 줬다고 했나 보다.

선생님이나 어른들의 눈을 피해 극장 뒤나 방천에서 자주 만났다. 아버지께 혼이 날까 봐 고양이 걸음으로 대문을 몰래 나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내달렸다. 극장이 가까워져서야 가쁜 숨을 고르곤 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고 나는 얼어붙은 듯 숨을 죽였다. 그는 형사가 되고, 나는 섬마을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우리는 가슴에 무지개 하나씩을 그려 넣었다. 그는 형사가 된 다음, 나를 각시로 삼겠다고 했다.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진학했지만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사를 돕게 되었다. 가끔 고등학교 책을 훑어보며 훌쩍일 땐 마음이 아팠다. 내가 학교 갈 때는 방천에 우두커니 서서 휘파람만 불었다. 그 모습이 슬퍼서 공부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만 방천을 맴돌았다. 하교 시간에 맞춰 둑에 곧잘 앉아 있었는데 나타나는 횟수가 뜸해졌다.

나도 사정이 생겨서 일 년 동안 휴학하게 되었다. 인천에 있는 작은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인천에서 학교에 다니라고 했지만 북적거리는 도시가 싫었다. 아니 그가 보고 싶어서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생각날 땐 송도 해수욕장을 거닐었다. 1년 후, 복학하기 위해 집에 돌아왔다. 그가 여전히 방천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을 것만 같아서 내달렸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반가움에 덥석 안을 뻔하였는데 준이 아버지였다.

“돈이 웬수지, 웬수야. 고등학교가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보내달라고 떼를 쓸 것이지. 물에 뛰어들긴 왜 뛰어들어 멀쩡한 놈이…….”

얼마나 상급 학교가 가고 싶었으면 말도 못하고 물에 뛰어들었을까. 그의 휘파람 속에 그리 큰 아픔이 숨어있는 줄 몰랐었다. 가슴에 담을 수 없어서 보낸 신호가 휘파람이었다니…….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그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나를 기억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물에 뛰어들던 날, 기억 속에 있던 모든 것도 잠재운 듯했다. 나는 준이 색시가 되지 못했고 섬마을 교사도 되지 못했다. 준이의 꿈도 여전히 가슴속에서만 산다.

방천에서 빈 휘파람만 목이 터져라 불었다.

 

 

 

 

 

 

2014. 1. 27 <김근혜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