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냄새 / 한경희

테오리아2 2022. 9. 2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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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이다. 바람이 살랑, 내 블라우스 자락을 부풀린다. 동네 아이들이 떠난 그네에 앉아 고개를 젖힌다. 어둠과 맞닿은 나뭇가지마다 별들이 매달렸다. 밤하늘에는 온통 외로움이 물들어 있다. 세운 무릎에 손깍지를 끼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싶게 한다.

 

숨을 크게 쉬어 본다. 흘러 다니던 꽃향기가 폐부 깊숙이 빨려든다. 그 속에서 나는 잊고 있던 냄새의 한 끝자락을 붙잡는다.

 

 

엄마에게선 항상 달큰한 냄새가 났다. 달달한 과일이 농익은 냄새였다. 고운 분가루를 탁탁 두들려 발라 살 속 깊숙이 그 냄새를 밀어 넣고, 겉은 분내로 은은하게 감춘, 한없이 포근했던 냄새. 엄마의 살 냄새가 좋아서 나는 자주 품에 안겼다. 가슴을 한껏 부풀려 흩어지는 냄새를 붙들었다 맡으면 맡을수록 그 냄새는 더욱 그리워지기만 했다.

 

"엄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

 

"글쎄. 난 모르겠는데."

 

사과를 깎던 엄마는 사과 향인가 보다고 했다. 상큼한 사과 향기가 엄마 냄새와 섞여 코끝에서 맴돌았다. 그때 나는 그 어떤 불행도 침범할 수 없는 완전한 행복감을 느꼈다. 내 행복의 기억은 그렇게 냄새에서 시작된다. 나는 아빠의 냄새를 모른다. 아빠에게 먼저 안겨 본 적이 없다. 어릴 적, 술을 마신 아빠는 가끔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상하기 직전의 그 시큼한 곡물 냄새가 싫어 고개를 돌리면 아빠는 내 볼에 턱을 부볐다. 사포처럼 껄끄러워 나는 매번 얼굴을 찡그렸다.

 

 

아빠가 돌아가신 날 제일 먼저 다가온 것은 향냄새였다. 버금버금 육개장 끓는 냄새, 시원스레 화투짝 내리치는 소리, 음식 쟁반을 나르던 분주한 걸음들 사이를 뒤덮은 향냄새. 그날의 풍경은 간간이 들리는 울음소리만 아니라면 흡사 잔칫날 같았다. 초상집을 덮어버렸던 둥글고 무거운 향의 얼룩, 그 어두운 냄새.

 

 

 

 

 

그날 이후 향냄새는 어딜 가나 나를 따라다녔다. 장미 밭에서도 최루탄 가득 퍼진 교정에서도 더욱 진하게 나를 붙들었다. 여동생이 밤마다 아빠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환청에 괴로워할 때, 나는 환후幻嗅에 시달렸다. 이십 대 초반 내 청춘을 곰삭힌 그 냄새는 다름 아닌 죽음의 냄새였다. 냄새는 아빠에 대한 기억보다 먼저 움직이고 눈물보다 먼저 젖어 들었다. 그리움보다 더 짙게 내 혈관을 떠돌았다. 내 불행의 기억 또한 냄새에서 시작되었다.

 

 

그에게서는 숲 속 바람 냄새가 났다. 시원한 송진 향이 어우러진 청량하고 조금은 쓸쓸한 초가을의 냄새, 넓은 어깨에서 유독 진하게 퍼졌던 그 냄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길 좋아했던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연애 시절 나에게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다. 손잡는 것도 주저하던 숙맥이 수줍게 말을 건넸다.

 

"흠, 뭐라고 설명을 못 하겠어. 화장품 향도 아니고 비누 냄새도 아닌데….

 

그 냄새 때문에 나에게 끌렸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싱그럽게 갓 피어난 젊은 여인의 향기였을 것이다.청춘의 냄새이기도 한 그 냄새는 시든 청춘과 함께 사라졌다. 내가 맡을 수 있었던 나의 냄새, 사랑하는 사람만이 맡을 수 있는, 그 사이에서만 허락된 일이었을까.

 

 

남편은 지금도 가끔 그 냄새를 그리워한다.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쓰고 향기 나는 삼푸를 써도 그때의 냄새가 안 난다고 말한다. 청춘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그 냄새 또한 기억에서만 존재한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기 전 오로지 엄마였을 때 났던 그 냄새처럼.

 

나도 아이를 낳았으면 엄마의 냄새가 났을까. 세상의 어미들에게서만 나는 냄새. 아니 그 향기가 멈추어버린 내 향기가 그립다. 이 봄밤에, 두고 온 청춘의 향기. 나는 가질 수 없었던 엄마라는 향기. 그리고 아빠가 남기고 간 향냄새까지 다 찾을 수 있을까.

 

아슴푸레 봄 향기가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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