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그런 일이 있었다/강철수

테오리아2 2022. 9. 2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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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여의도 S문화재단 인문학 강좌의 학생일 때가 있었다. 대부분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노년의 학생들이었지만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해서 교실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한 학기가 끝나면 지도교수를 모시고 현장답사 여행을 떠날 때가 많았다. 입회 5년 차에는 일본 근현대사를 강의한 H 교수를 모시고 일본 규슈(九州)지방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발자취를 둘러보고 왔다. 이듬해인 그해에는 과별 답사 여행은 모두 보류되고 주야간 학생 전원이 국내 답사 여행을 간다고 했다.

 

마침 그 학기에는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경을 공부하고 있어서 학기가 끝나면 사우디아라비아로 답사 여행을 가지 않을까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우리 교실을 친히 찾아와 두툼한 한글판 코란경 한 권씩을 선물로 준 이슬람 사업가의 환대를 받을지도 모르는데…,

단풍철인 시월 하순, 1박 2일 일정으로 일흔 명 정도의 학생들이 두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전라북도 대둔산으로 향했다. 이번 학기 한국 근현대사를 수강한 학생들이 동학농민운동의 최후 거점인 그곳을 답사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했다. 아마 그 보고를 받은 재단 고위층에서 다른 학생들에게도 공부가 되리라 생각해서 총동원령(?)을 내린 게 아닌가 싶었다.

 

8백7십여 미터의 대둔산, 1894년 11월 중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쫓겨 대둔산 정상으로 밀려났다. 한겨울 엄동설한 속에서 석 달 동안 적과 맞서다가 이듬해 2월 17일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25명 전원이 목숨을 잃은 동학농민운동 유적지다. 답사를 왔으니 의당 그곳까지 올라가 봐야겠지만 적지 않은 나이들이라 그쪽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정읍으로 나가 전봉준 고택, 동학농민운동 기념관, 동학군이 관군에게 대승을 거둔 황토현 전적지 등을 돌아보고 늦은 점심 후에 귀경길에 올랐다. 세상사가 뜻하지 않은 데서 굽이치듯 ‘그런 일’도 그 귀경길에서 일어났다. 뉘엿뉘엿 해가 서쪽으로 기운 해거름에 버스가 갑자기 용인 나들목으로 빠져드는 게 아닌가. 공지된 일정에 없는 일이라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 부근 어디 소문난 맛집에서 성대한 만찬으로 답사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할지도 모른다 싶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차가 정차한 곳은 음식점이 아니라 대한인삼공사 홍보관 앞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타고 다닌 버스도 이 홍보관 차가 아닌가. 양쪽으로 도열 해 있는 직원들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대낮처럼 조명을 밝힌 실내로 들어갔다. 2, 3백 명도 너끈히 앉을 만큼 널찍한 공간, 푹신한 소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한 제복에 아크릴 이름표를 단 아가씨들이 홍삼액 팩에다 빨대를 꽂아 한분 한분, 재바르게 돌렸다.

 

 

 

 

 

 

출출하고 목마르던 차에 마신 시원한 그 액체는 즉시 약효를 발휘했다, 여기저기서 ‘맛이 좋다 ’, ‘어, 시원하다’, ‘딱 하나만 더 먹었으면’ 등의 찬사가 쏟아졌다. 물실호기(勿失好機), 투피스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이 단상으로 올라 마이크 앞에 섰다. 자신이 대한인삼공사 홍보부장이라며 우리 인삼이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되는 현황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나라들에서는 우리 인삼이 만병통치약 정도로 파격적인 대접을 받는다며, 앞으로 더 많은 나라로 수출해서 기필코 수출 보국(輸出報國)에 이바지할 것임을 다짐했다. 이어서 이곳 홍보관에서 통상 할인율은 20퍼센트인데 오늘 오신 S문화재단 여러분에게는 특별히 10퍼센트를 더 해 총 30퍼센트를 할인해 드리겠다고 했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 속에는 추가할인에 대한 감사보다는 수출 보국에 대한 성원이 더 크지 않았을까. 다람쥐나 가발 수출 시절을 건너온 우리 세대들에게 ‘수출’은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이는 애국 단어가 아니던가.

 

다음으로 마이크 앞에 선 분은 앞머리가 시원하게 벗어진 학자풍의 남자, 대한인삼공사 연구소장이었다. 홍삼진액인 홍삼정 뚜껑을 열어 찻숟갈로 검붉은 액체를 연신 길어 올리며 그 효능을 해학적으로 풀어나갔다. 남자, 특히 힘없는 남자에게 특효가 있다며 남녀 관계의 아슬아슬한 부분까지 치고 올라가는 게 아닌가.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면서 여기저기서 발을 구르는가 하면 쌍팔년도식 휘파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어라! 갑자기 숙연해지는 실내, 놀랍게도 우리 학생들로부터는 물론이고 온 국민의 추앙을 한몸에 받는 은발의 R 박사님이 단상으로 나오시는 게 아닌가. 천장이 날아갈 듯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재를 드려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국내 최고 석학들을 초빙하고 본인도 직접 강의하신 S문화재단 이사장님이 아니신가. 요즘은 고령이라 강의는 접으시고 복도를 거닐며 학생들 수업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기만 하셨다. 이번 답사 여행에도 함께하지 못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을까.

 

나직한 목소리, 스승님이 드디어 말문을 여셨다. 건강 관리의 당위성을 시작으로 자신이 일상 속에서 건강을 위해 행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짚어 나갔다. 전에도 한 번 들은 것 같았는데 장소 탓인지 새롭게 마음에 새겨졌다. 말미에는 자신이 당뇨로 숱한 고생을 했는데 홍삼진액인 홍삼정을 먹고부터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셨다.

 

일행들이 대한인삼공사 로고가 새겨진 커다란 유백색 비닐백을 들고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그걸 들지 않은 맨손은 한 사람도 없고 양손에 하나씩, 두 개를 든 사람은 꽤 여럿이었다. 아마 그중 하나는 아들 내외나 딸 내외 몫이 아니었을까. 나는 애들이 공항 면세점에서 사 온 홍삼액이 많이 남아있는지라 홍삼정 몇 병만 샀다.

 

이튿날 아침 아내가 그걸 가짜로 판정했다. 면세점 것과 상표와 용기는 비슷한데 진액이 묽고 맛도 영 아니었다. 유령 회사였나 싶어 그쪽에다 전화를 걸어보았다. 용인 쪽에 홍보관이 있냐고 했더니 약도를 보내주겠다며 친절히 응대했다. 그분들은 죄가 없을 것이다. 공기업인 한국인삼공사라 사칭하거나 그런 낌새를 내비친 적도 없지 않았는가.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우리들의 지레짐작이 문제였을 것이다.

 

산업화 시대의 역군들인 우리 머릿속에는 국가의 큰 수입원인 담배와 인삼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 할 수 없는 사업으로 각인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홍삼 가공품은 당연히 전매청을 이어받은 국가기관 제품이라 믿었을 것이다. 아니라고 여겼다면 누가 그리 한 아름씩 샀겠는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연만한 나이들, 나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가 전매청의 후신이 한국담배인삼공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공사가 이미 이태 전에 민영화되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르지 않았을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아득한 그때를 되짚어 본다.

아침 일찍 공원을 걷는 이들에게 공짜 여행 표를 나눠 주는가 하면, 동창회 같은 모임의 책임자를 찾아가 차(茶)도 사고 밥도 사고…. 이러저러하다 꼬드겨서 홍보관으로 데려오기만 하면 숙달된 조리사들에 의해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리는 건 식은 죽 먹기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2백만 원 정도 운임인 자사 버스 두 대를 제공하고 줄잡아도 4천만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S문화재단 건은 대박 중의 대박일 것이다. 게다가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R 박사님까지 찬조 출연을 시킨 건 시쳇말로 신의 한 수가 아니던가, 보리 밥풀로 잉어를 낚은 격인 그 담당자는 두둑한 보너스에다 포상 휴가를 갔을지도 모른다.

 

R 박사님도 우리처럼 대한인사공사가 전매청의 후신이라 철석같이 믿지 않았을까. 하지만 재단 실무자 측에서는 그 회사가 전매청의 후신인 한국인삼공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버스 두 대 후원, 받을까, 말까, 한참이나 망설였을 것이다. 결국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데는 그에 대한 조건이 고작 귀경길에 자신들의 홍보관에 잠시 들르기만 하면 된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 둘러보듯 대충 살피고 나오면 되는 걸로 생각하고 여행비 절감 차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 홍보관 안에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탈탈 터는 정교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아주 정말로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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