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자객 / 권현숙

테오리아2 2022. 9. 2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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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초입이라 바람 끝이 차다. 겨우내 햇살 못 본 허여멀건 한 내 목덜미에 때 아니게 붉은 꽃 한 송이 맺혔다. 홍매 꽃망울만 하던 것이 순식간에 명자꽃송이만큼 확 부풀어 오른다. 꽃 핀 자리가 불침이라도 맞은 듯 뜨끔거린다.

엉겁결에 당했다. 본능적으로 손이 목덜미께로 향한다. 뜨끔거리는 곳을 찾아 엄지와 검지로 꽉 꼬집어 짜니 개미 눈알만 한 침 하나가 딸려 나온다. 그 순간 가슴 언저리가 스멀거린다. 화들짝 놀라 신들린 무당처럼 풀쩍댄다. 윗도리를 마구 털어대자 꿀벌 한 마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잠시 내 발 옆에서 비칠대더니 곧 생이 끝날 걸 아는지 모르는지 꽁지가 빠져라 달아난다.

행여 성질 급한 꽃이라도 만날까 싶어 들성지로 향했다. 사방을 아무리 휘둘러보아도 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겨우 노란 실금으로 터지고 있는 산수유 꽃망울만 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봄바람에 성급하게 간질대던 마음이 화를 불렀나 싶어 후회막급이다. 다급한 내 목소리에 문우 황선생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헐, 아직 꽃도 안 폈는데 이게 뭔 일이래요?”

걱정스런 얼굴로 약을 발라준다.

“그러게요. 꼬이라는 사내는 안 꼬이고 얼빠진 벌이나 꼬이네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던지는 싱거운 소리에 그녀가 웃는다. 약효 때문인지 명자꽃송이는 더 이상 부풀지 않았다. 꽃보다 먼저 깨어난 벌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희한한 일이다. 굶어죽을 게 분명한데 어쩌자고 벌써 깨어나 저 죽고 날 아프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뜨끔한 느낌도 웬만큼 누그러들자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그러다 번쩍, 기억 하나가 켜진다.

볕살 좋은 날 경주 러브캐슬에 다녀온 적이 있다. 여자 셋이서 바다를 보러 가던 중이었다. 지나던 길에 눈에 들어온 그곳, 익히 소문을 들은 터라 호기심이 동했다. 지극히 은밀한 공간, 그 속에서 보게 될 것들을 상상하니 지레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귓가에 닿는 연인의 입김처럼 온 몸의 말초신경을 짜릿하게 깨워줄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숨소리는 낮아지고 눈은 더욱 동그래졌다. 하지만 조형물과 토우의 적나라하고 과장된 모습을 보는 순간 외려 웃음이 터졌다. 허풍을 빼고 나면 한껏 오그라들 남자들의 자존심이 안쓰러웠다.

기대감이 슬슬 실망감으로 바뀔 즈음 춘화가 가득한 방으로 들어섰다. 남녀상열지사로 뜨거운 벽면 가득히 야릇한 숨소리가 마구 흘러내렸다. 진달래꽃 아래에서도 춘정은 만발하다. 계곡이나 주막, 기방을 가리지 않고 운우지정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이 거침없고 적나라하다. 은밀한 부분을 더 과장되게 부각시켜 표현해 놓은 그림이라니! 하물며 성에 대해서는 드러내기를 금기시했던 시대가 아니던가.

놀라웠다. 사회적 제도 이면에 숨은 인간의 억눌린 본능을 어찌 저리도 과감하게 담아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부부간이나 사대부, 양인 출신 남녀들의 건전한 성행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양반과 기생, 여종과의 일탈적 관계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더 과감하거나 에로틱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하도 리얼해서 그들의 사랑을 곁에서 몰래 엿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신윤복의 춘화 속 ‘문 밖의 여인’이 되어 달뜬 가슴으로 연신 마른 침만 삼켰다. 울타리 너머의 사랑을 갈망하는 욕구는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한 모양이다.

봄날 같은 연애를 꿈꿔본 적이 있다. 여태도 그 꿈은 가슴속 어디쯤 자객처럼 꼭꼭 숨어 있는 모양인지 명지바람 살살 불어오면 한번 씩 가슴이 달싹댄다. 자객은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와 가슴을 온통 헤집어 놓을지 모른다. 참으로 아찔하다. 위험천만하다. 콩알만 한 간덩이로 바람구멍 숭숭한 가슴을 지닌 채 멀쩡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도리질 치면서도 그 자객이 궁금하기도 한 이 이율배반적인 심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열기 오른 가슴을 누르며 끝자락쯤에 이르자 얄궂은 물건들로 가득한 매장이 나왔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야릇한 표정으로 각종 물건의 용도를 설명했다. 시큰둥한 친구들과는 달리 얇은 내 귀는 여지없이 팔랑댔다.

“요거 한번 뿌려 봐요. 그러면 사내들이 벌떼처럼 꼬여들 거유.”

장난 반 호기심 반으로 페로몬향수와 굵직한 핑크빛 로즈향초를 샀다. 앞으로 내게 벌떼처럼 꼬여들 사내들과 마른 대추처럼 말라갈지도 모를 남편을 어찌할까, 미리 걱정도 해가며 가방에다 잘 모셔두었다.

“이참에 춘화 속 여인네처럼 나도 찐하게 연애나 한번 해봐?”

야스런 농에 친구들의 배꼽이 죽어났다. 탁 트인 바다를 보자 등에 짊어진 향수 생각일랑 깡그리 잊어버린 채 해변을 마구 내달렸다. 집으로 돌아와 열어 본 가방 속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향초와 부딪힌 향수병은 효능 한번 검증해볼 새도 없이 처참하게 박살이 나버렸다. 파편을 털어내며 허탈감도 함께 탈탈 털어냈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어 버렸다.

향수범벅이 된 그 가방을 그대로 메고 나온 게 화근이다. 동면에서 어렴풋 깨어난 꿀벌 한 마리, 잔향에 이끌려 비몽사몽 날아들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던 걸까. 속았구나, 분한 마음에 목숨 걸고 일침을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벌에게 벌 받은 자리, 피어난 꽃송이가 또다시 뜨끔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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