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이소(離巢) / 권상연 - 2019 호미문학대전 흑구문학상 금상

테오리아2 2022. 9. 2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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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묘장을 찾았다. 봄기운이 물씬 오른 모종들이 모판에서 키 재기하듯 경쟁적으로 자라났다. 옆 지기의 공간을 침범하여 굵게 자란 녀석이 있는가 하면 비좁은 곳에서 키만 삐죽이 올라온 녀석도 있다. 모판을 벗어나려는 생존 본능은 틈이 조금만 주어져도 달아나려 한다. 이때쯤이면 농가에서는 모종들에게 흔들기를 시작한다.

 

매정하게 자리를 옮긴다. 비좁은 포트에서 얼마나 숨이 막혔으면 물 빠짐을 위해 뚫어놓은 구멍으로 뿌리를 내렸을까. 이삿짐 빠진 빈방처럼 모판이 옮겨가고 남은 빈자리마다 잘려나간 뿌리들이 허옇게 널브러져 있다. 말못하는 식물이라고 왜 안 아프겠는가.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면역력이 강해진다. 모종이 제금 나기 전까지 농부는 수시로 모판의 자리를 바꿔주고 흔들어 주면서 정을 뗀다.

 

긴 장대가 고추모를 훑어간다. 장대가 지나간 자리마다 모종들이 고개를 숙이며 쓰러진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듯 부스스 일어나 자리를 잡는다.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닌 듯 빳빳해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정 떼기는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된다. 하우스 속 모종들은 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뿌리가 튼튼하게 내리고 줄기도 굵어진다고 한다. 대나무 장대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초록 물결이 파도치듯 일렁인다. 사회로 첫발을 내디뎠던 날, 겨울바람을 타며 펄럭이던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상급학교의 진학을 눈앞에 두고 아버지가 실명했다. 어린 마음에도 어려운 가정형편이 읽혀졌다. 어머니 혼자서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뒷바라지하기에는 무리였다. 몇날며칠 교무실을 들락거려도 뾰족한 수가 생겨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끊임없이 정보를 가져왔다. 시험 쳐서 장학생이 되는 길이 있었고 시험 결과와 상관없이 전액 장학생으로 오라는 학교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수술로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린 우리 집 형편은 나에게 끊임없이 입을 덜어줄 것을 요구하는 듯했다.

 

기숙사가 잘 갖춰진 공장이라 했다. 담장 대신 허술하게 쳐진 철망이 어머니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늦깎이 겨울바람이 할릴 없이 어머니의 푸른 치맛자락을 들추어냈다. 어머니가 나와 짐을 남겨놓은 채 돌아섰다. 그제야 낯선 곳에 홀로 남겨졌다는 걸 알았다. 두려움이 온몸으로 엄습해 왔다. 어머니가 마음을 바꿔 나를 데려갔으면 싶었지만 한번 돌아선 어머니의 발걸음은 끝내 되돌려지지 않았다.

 

 

이소는 어린 새가 둥지를 떠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깃털이 어느 정도 자라 근육이 강해진 새는 둥지를 떠난다. 이소를 시키기 전, 어미 새는 뱀, 쥐, 새 등 영양가 높은 먹이를 새끼에게 먹인다. 이소 당일에는 아침부터 먹이를 주지 않고 굶긴다고 한다. 먹이를 잡아와서는 곧장 새끼에게 주지 않고 둥지 밖으로 새끼를 불러낸다. 배가 고프면 나와서 받아먹으라는 의미다. 이때 새끼는 어미의 부름에 이끌리어 둥지 밖으로 몸을 내 던진다. 생애 첫 날개 짓이다. 이 날을 위해 어미는 얼마나 많은 용기를 내야 했을까.

 

재대한 아들이 집을 구해 나갔다. 여느 엄마들처럼 나도 아들을 위해 몇날 며칠을 고민하며 이불과 가재도구를 사러 다녔다. 마지막으로 쌀을 실어다 주고 돌아서는데 갓 태어난 병아리 한 마리를 닭장 밖 울타리 너머에 떨어뜨리고 온 기분이 들었다. 개수대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던 아들이 밥을 제대로 해 먹을지, 빨래나 제대로 할지 걱정이 앞섰다. 가스렌지 불이나 잘 켤 수 있으려나, 가스 불 안 잠그고 나가면 어쩌지? 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다.

 

내 아이를 독립시키고 나서야 나를 두고 떠났던 어머니의 마음이 읽혀졌다. 닭장 같은 기숙사에 나만 두고 떠나면서 얼마나 속상했을까. 눈물 나도록 야속했던 어머니는 안 보이는 곳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내가 앞만 보고 달려갈 동안 어머니는 나의 뒷모습까지 지켜보았으리라. 모질게 돌아섰던 어머니의 발걸음은 농부의 손안에 있던 장대를 들었던 발걸음은 아니었을까.

 

모든 새끼들이 이소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 한다. 새끼들에게 있어 이소는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어미는 새끼에게 수차례의 비행 연습을 시킨다. 어미는 이소를 위해 모든 준비를 다 해주지만 이소를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아무리 가혹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 법칙을 순순히 따르는 것은 그것을 거스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은 새들의 이소처럼 자연의 섭리에 적응하며 산다. 오직 인간만이 그 섭리를 거스르고 또 수차례 반복할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동생은 나에 비해 많이 별난 엄마다. 쌍둥이인 두 조카가 상급 학교에 진학하자 뻔질나게 조카들의 방을 들락거렸다. 방을 구할 때도 원룸은 비좁다며 투 룸을 고집했다. 날마다 폰으로 문단속을 확인하더니 조카들이 실수로 가스 불을 안 잠그고 나간 후에는 그 핑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조카들의 집을 오르내렸다. 조금은 답답해 보이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잘 자란 조카들을 보면 동생도 나름의 이소에 성공한 듯하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에게 쏟아졌던 어머니의 관심을, 저울로는 달 수 없는 그 무게를 나는 늘 부족하다고 불평했다. 내가 받은 사랑이 작으니 당연히 줄 수 있는 사랑도 많지 않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내 안에서 씨앗으로 심어졌고 풍성하게 자라났다. 새끼를 품은 어미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 주어도, 주어도 끝없이 줄 것이 많은 어머니로 성장한 것이다.

 

비질을 하듯 장대가 모종을 쓸고 간다. 장대를 든 농부의 어깨는 한 포기라도 생채기를 낼까 염려하여 팔에 한껏 힘을 준다.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에 어린모들을 길들여야 하는 농부의 마음을 알아챘을까? 시들했던 모들이 농부가 뿌려대는 물줄기 아래서 새파랗게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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