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자 2

향기를 듣다/최민자

딱새 한 마리가 동네의 아침을 깨우듯 유자 한 알이 온 방의 평온을 흔든다. 방문을 열 때마다 훅 덮치는 향기. 도발적이다. 아니, 전투적이다. 존재의 외피를 뚫고 나온 것들에게는 존재의 내벽을 뚫고 들어가는 힘도 있는 것일까. 절박한 목숨의 전언 같은 것이 내 안 어딘가를 그윽하게 두드린다. 맛보다는 향기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유자는 레몬과 닮은 꼴이다. 레몬 향기가 금관 악기면 유자 향기는 목관악기다. 레몬 향기가 바이올린의 고음이면 유자 향기는 비올라의 중음이다. 매끈한 피부에 길쭉한 몸매, 청순하고 새치름한 레몬이 도회 아가씨라면 우툴두툴하고 우루뭉술한 유자는 투박하고 속정 깊은 남도 아낙을 닮았다. 스러지는 것들에게는 소멸의 공포 같은 게 있는 것인가. 유자는 요 며칠 더더욱 맹렬하게 향기를 뿜어..

빈 듯 찬 듯/최민자

5년 넘게 땅속에서 묵었을 매미 소리를 모카커피에 타서 마신다. 오늘 아침 내 특제 메뉴다. 매미 소리는 먹기 좋게, 적당히 분절되어 커피 잔에 녹아든다. 어떤 소리는 튜브에서 쥐어짜듯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어떤 소리는 톰방톰방 방울져 떨어진다. 짝에게 닿아야 할 노랫가락을 내 잔 속에 빠뜨렸으니 녀석들은 끝내 짝짓기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나온다. 파가니니인지 텔레만인지, 얼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려나,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스쳐 가는 바람에 연연하지 않는 늙은 나무처럼 나도 이제 무엇을 오래 붙들지 않는다. 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게 하고 흘러가는 것들은 흘러가게 놔둔다. 기억해 봤자 금세 잊고 말 터, 대지한한 소지간간(大知閑閑 小知間間, 큰 앎은 느긋하지만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