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희 2

옥수수 벗기기 / 이복희

어느 분이 보내준 옥수수 한 자루. 검푸른 옥수수들이 금방이라도 주머니의 망을 찢고 튀어나올 것처럼 싱싱하다. 보기만 해도 실팍하다. 얼른 한 개를 꺼내 든다. 손에 전해 오는 느낌이 제법 푹신하다. 이미 시들어 누릿해진 한 겹 겉껍질 아래 진한 초록색 잎맥의 결은 거칠다. 마치 갑옷이라도 두른 듯 단단하다. 껍질을 벗겨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도톰한 그 질감에 끌려 벗겨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야무지게 여민 품이 여간해서는 속을 내주지 않을 기세다. 어디서부터 공략할까. 색다른 긴장감이 서늘하게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내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치미를 뚝 떼고 제 몸을 맡긴 양이 천하태평이다. 어차피 내줄 요량이면서 끝내 모르쇠 하는 것 같아 앙큼한 맛도..

카테고리 없음 2022.09.29

구월의 봉숭아/이복희

9월이 저물 무렵, 유난히 눈에 밟히는 꽃이 있다. 봉숭아다. 담장 밑, 공원 한 귀퉁이, 동네 길섶에서 웃자라 쇠어버린 봉숭아. 다른 어떤 풀이나 꽃보다도 시든 봉숭아만큼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없다. 여름내 지천으로 피어 있어도 마음 없이 바라보던 꽃, 싱싱한 선홍빛 꽃잎이 어서 꽃물을 들이라고 유혹할 때도 건성 스쳐 지났다. 손톱에 물들이던 여름밤의 설렘을 잠깐 떠올려 보지만 먼 유년의 뜰에 두고 온 꽃일 뿐이다. 하지만 구월에 만나는 봉숭아는 달랐다. 어느새 굵어진 마디와 억센 줄기, 그리고 빛바랜 꽃송이가 비로소 마음에 안겨오는 것이다. 이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고 여름 한철 맛본 꽃의 영화도 사라진, 철지난 봉숭아가 어린 날 나의 유치했던 객기를 떠올리게 해서다. 미처 시들어버리기도 전에 뽑혀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