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 온 동네는 볕도 들지 않는 골목이 얼기설기 미로처럼 얽혔다. 시간이 멈춘 듯 음습한 골목에는 잡풀이 우거지고 악취가 먼지처럼 일렁였다. 그보다 골목을 걷다보면 벽(壁)이 나타나 길을 막는 것이 문제였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어도 또 다른 벽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곤 했다. 벽의 모습은 엇비슷했다. 암적색 타일이나 벽돌로 만들어진 벽도 있었지만, 대부분 우중충한 잿빛 콘크리트 벽이었다. 철 지난 전단지가 붙어 있고, 상형문자 같은 글씨가 보이는가 하면, 얼룩이 진데다 움푹 파여 있기 일수여서 찢겨나간 낡은 지도 같았다. 벽 앞에 서서 벽이 침묵하는 것을 보았다. 벽처럼 여러 의미를 갖는 말도 흔치 않으리라. 일상에서 대하는 거실이나 건물의 벽, 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리거나 담쟁이넝쿨이 간당간당 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