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랑수필가 4

낙엽 한 장의 긍정/ 김이랑

탁탁탁, 둔탁한 소리가 한밤의 고요에 파문을 일으켰다. 가로등 빛을 받아 은행잎이 노랗게 빛나는데, 그 아래에서 한 노인이 쇠지레로 무언가를 두들기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노인이 부수는 그것은 초저녁에 내가 내다버린 의자였다. 몇 년 전, 증권사 사무실을 철거하는 현장을 지날 때였다. 폐기물더미 옆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뒹구는 의자가 눈에 띄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것은 비싼 의자였다. 마침, 쓰고 있는 의자가 수명을 다해 새 것을 사려던 참인데, 버릴 거면 하나 가져가도 되냐고 물으니 인부는 대수롭지 않은 듯 허락했다. 그 중 나은 걸 고르자는 셈법에 선뜻 만 원을 건네고 나서 등받이가 높은 의자를 골랐다. 의자는 손볼 곳이 많았다. 덜그럭거리는 팔걸이며 삐걱거리는 허리며 윤기 잃은 가죽이며, 중년의..

파스-김근혜

파스 김근혜 꽃샘바람이 가지를 흔든다. 물오른 매화의 숨소리가 거칠다. 그녀가 뭇사람들 틈에 낀 순간을 담고 싶다며 매화꽃 그늘에서 방긋 웃는다.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보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우울증이 도졌다. 보드레한 봄바람이 얼굴을 간질여도 눈가에 소금기가 어른거렸다. 이혼소송에 휘말리고, 유방암 수술을 받고도 씩씩했었는데 포장하지 않은 삶에 바람이 스쳤다. 그녀는 지금 인생의 간절기에서 봄을 앓고 있다. 내게도 봄은 아픔을 수반했다. 정리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곳곳에서 통증을 일으켰다. 어느 기억 모퉁이에선 가슴이 시렸고,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선 머리가 아팠다. 진통제 몇 알로 치료되는 가벼운 증상이 아니었다. 종종 파스가 필요했으나 옆에는 약효 지닌 사람이 없었다. 살다..

나비의 무게 / 김이랑

나비의 무게 / 김이랑 누구의 영혼일까. 날개 한 겹이 풀잎처럼 하늘거린다. 나는 붓이라는 듯 허공에 나붓나붓 휘갈기는 날갯짓, 그 초서草書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필법이라, 필시 영혼이 자유로운 족속이겠다. 중력은 무게를 가진 것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자유를 갈망하는 영혼은 그래서 살을 빼고 뼈를 깎는데 대대로 생을 바쳤으니, 그것이 날짐승이다. 하지만 날짐승이라고 부르기에는 춤사위가 현란하고 허공을 배회하는 한낱 벌레라고 보기에는 무늬가 신비로우니, 아마 다른 차원에서 온 영혼이 아닐까 싶다. 나비, 이름에 받침이 없는 그는 꽃에서 꽃으로 건너뛰는 게 일상인데, 향기로운 삶으로 보아 그만한 귀족이 세상에 없지 싶다. 나풀⦁나풀 허공에 피었다 지는 데칼코마니에 무엇이 있지 않고서야, 가볍지만, 시작..

목포문학상 너와집-김이랑

너와집 김동수 죄라도 지었을까. 유배라도 떠난 듯 너와집은 두메에 있다. 산촌박물관에 전시된 집은 박제일 뿐, 그 영혼을 찾으려면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주가곡선株價曲線에서 뛰어내리고 쿵쾅거리는 세상일랑 하루쯤 버려야 한다. 도시를 벗어나 산 넘고 물 건너는 길에 유랑민의 노래 몇 소절 뿌리면 좋다. 저만치 누가 온들 돌아오는 사람이겠냐는 듯 너와집은 무덤덤하다.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았으니 허름해도 좋고, 빈틈없는 삶을 바라지 않았으니 허술해도 괜찮다며 매무시를 여미지도 않는다.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이 없으면 어떻고 물 한 그릇 건네는 이 없으면 또 어떤가. 먹어보고 입어보라는 새빨간 장삿속에 넋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니 얄팍한 지갑 걱정이나 마음의 무장일랑 내려놓고 자적自適에 들어본다. 새끼 짊어지고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