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새벽, 흔들리다 / 장미숙

테오리아2 2022. 2. 11. 15:02
728x90

 

 

팽팽한 대치다. 십여 분의 짧은 시간이 무겁고도 가볍게 흔들린다. 이불을 돌돌 말고 불편한 자세로 웅크린 시간, 벽과 유리를 사이에 두고 차가운 어둠과 따뜻한 어둠이 공존(共存)하고 있다. 푸른색 어둠에 갇힌 밖의 소리가 들려온다. 문명과 자연의 마찰음, 추위와 숨바꼭질하는 바람 소리, 뜨거운 심장이 뿜어내는 누군가의 입김, 어둠에 익숙한 어느 짐승의 울음소리, 어둠 속에서도 팔팔하게 살아있는 소리, 그것들은 내게 혼자가 아니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이내 따뜻한 어둠의 소리가 들려온다. 규칙적이고 안정된 숨소리, 낮게 코 고는 소리, 이불 구겨지는 소리, 안락하고 평온한 소리. 그것들에 귀를 기울이자 팔다리가 풀어진다. 무장 해제된 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방바닥의 온기는 좀체 몸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안락함은 긴장을 마비시킨다. 편안하다는 것, 육체의 편안함이 주는 안락함은 때로 어떤 유혹보다 치명적이다.

 

 

하지만 현실을 일깨우는 알람 소리,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다는 듯 알람은 야멸차다. 나태해진 이성의 등을 냅다 후려친다.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걸 온몸으로 알린다. 알람 소리는 어둠의 옷자락처럼 차갑다. 고요와 평안을 순식간에 깨뜨려놓고 짐짓 딴청을 피우듯 울어댄다. 소리에 순응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선택의 순간이다. 몸과 마음은 소리에 점령당한 채 엎어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푸른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접전, 그 접전(接戰)에 하루 치 삶의 질이 달려 있다. 단 몇 분이라도 휴식을 연장할 것인가. 영양 있는 아침 식사를 택할 것인가. 머리는 앞서지만, 몸과 타협이 어려운 일은 매일 새벽 반복되고 있다.

 

 

동짓달이 시작되면서 어둠은 더 깊어졌다. 힘든 계절은 이렇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겨울 어둠은 칼날을 품고 있는 듯 날카롭다. 아무리 몸을 움츠려도 뒷덜미를 낚아채는 새벽에 풀썩 무릎을 꿇어야 하는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편한 잠에 빠져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웅크릴수록 생은 무겁게 가라앉는다.

 

 

지난밤, 채 털어내지 못한 피로가 몸 구석구석에 엉겨 붙어 있다. 아니, 피로는 이미 몸에 터를 잡았다. 자신이 살 곳이라는 걸 감지한 듯 아예 자리를 펴려 한다. 피로에 몸을 내어주기까지 그래도 버텨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어느 한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자 피로는 세력을 넓혀 정신까지 지배했다. 이젠 일어서는 것조차 중심이 잡히지 않는다. 돌덩이를 걷어내고 직립의 자세가 되기까지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울컥 슬픔이 솟구칠 때도 있다.

 

 

바쁘게 뛰어다녀도 잠잘 시간이 부족한 날들이다. 불면도 몸속에 자리를 튼 지 오래되었다. 잠에 빠져보려 발버둥 칠수록 밤은 더 환해지고 생각은 가지를 친다.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과 불안을 동반한 생각이 소용돌이친다. 피로에 길든 육체는 냉갈령 같은 새벽을 두려워한다. 몸도 마음도 쉴 수 없는 나날들 속에 노동의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온다.

 

 

피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생활이다. 내 삶은 물론 다른 이의 삶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건 편한 숨과 거리가 멀다. 늘 가쁜 숨으로 생의 고개를 간신히 오르고 있다. 이 고개 넘어가면 내리막길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아직은 쉴 곳 없는 깔딱 고개다. 아니, 더 험한 비탈과 맞닥뜨려야 할지도 모른다.

 

 

새벽에 눈을 떠야만 하는 일상이 여러 해 되었다.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노동은 삶에 활기를 주었다.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정체되어 있던 생활에 생기를 주고 싶었다. 연연하지 않음으로 의미와 여유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도 있는 노동이었다. 새벽이 두렵지 않았고, 누구보다도 먼저 어둠을 열었다. 어느 날은 연한 하늘색으로 다가와 주는 새벽이 좋았다.

 

 

푸른 어둠이 장막(帳幕)처럼 드리워진 겨울 새벽도 견딜만했다. 내 의지에 의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노동은 삶을 옭아매지 않았다. 잘려나가도 그만인 곁가지는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곁가지라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삶의 무게가 내 어깨로 조금씩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새벽이 오는 게 두려웠다. 놀기 위해, 혹은 뭔가를 즐기기 위해 일을 하는 게 아닌, 오로지 살아내기 위해 해야 하는 노동은 뼈마디에 시퍼런 멍을 들였다. 가장이라는 나무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자 곁가지는 중심으로 옮겨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피하려 해도, 버리려 해도 늦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몇 달 전, 가장이란 나무가 무너져 내렸다. 병으로 뿌리부터 썩기 시작한 나무는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망연자실할 새도 없었다. 실 날 같은 물길이라도 잡고 곁가지는 일어서야 했다. 그나마 잡을 수 있는 희미한 물길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노동은 이제 내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더 이상 여유로움이나 낭만 같은, 커피 향 나는 단어는 생활에 낄 틈이 없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사투가 있을 뿐이다. 나무가 뿌리부터 무너졌는데 곁가진들 온전할까. 몇 달 사이 죽음이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찾아들었다. 방바닥에 몸을 눕히는 시간은 자꾸만 줄어들었다.

 

 

육체의 무너짐은 생존의 바퀴를 뒤틀리게 한다. 새벽이 무거워진 건 끝을 알 수 없는 노동에 미래의 삶을 저당 잡혀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어서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날들 속에 결핍은 더 깊어졌다. 책은 쌓여가고 사색은 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허공을 떠돈다. 물질의 궁핍보다 더 좌절을 안겨주는 정신의 궁핍 속에 허덕거리다 밤을 새우기 일쑤다.

 

 

새벽잠을 구걸해본 적 없었던 몸이 언젠가부터 잠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린다. 부족한 잠과 부족한 영양을 한꺼번에 채울 수는 없다. 영양 있는 아침밥을 선택할 것인지, 아침밥을 포기하고 잠을 택할 것인지 매일 접전이다. 노동으로 빼앗길 에너지를 위한 밥, 불면으로 빼앗긴 잠에 대한 보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

 

 

아직 겨울은 시작에 불과하다. 섣달이 되고 정월이 오면 바람은 냉기를 두르고 사람의 세상을 휩쓸고 다닐 것이다. 차가운 어둠과 따뜻한 어둠의 대치는 더욱 치열해질 터, 그 안에 서 있는 벽이 흔들린다. 새벽이 흔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