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문턱/김근혜

테오리아2 2022. 2. 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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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

들이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낚싯바늘에 걸려 올라온 붕어처럼 몸살을 앓는다. 저 문턱을 넘어서면 한동안 바깥세상과 단절된다. 생강나무가 꽃을 피우려 할 때의 살 터짐 같은 고통이 나를 옥죈다.

아들은 태내에서부터 거대한 문턱을 만났다. 세상 발發 기차에 몸을 싣기 싫은지 궁宮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세상에 나와서 처음 만난 건 어미의 따뜻한 품이 아닌 차가운 병실이었다.

직립한 다음 만난 건 문지방이었다. 턱에 걸려 몇 번이나 마당으로 곤두박질쳤다. 무릎에 달라붙은 피딱지는 삶의 마디를 만들며 아들을 키워내고 있었다. 인생은 늘 위태위태한 고비를 넘기며 상처 난 힘으로 자라는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던 그해도 대학입시라는 문턱은 기어코 아들을 앓게 했다. 연구원으로 지내면서 큰 성과를 내고 반열에 들었다. 대학교에 들어갔으면 영광의 날은 없었을 거라며 가시를 박았다. 날선 말이 낯설었다. 그렇게 우리 둘 사이에 높은 문턱이 생겼다.

대학교 가서 다양한 지식과 그 나이에 누릴 문화를 경험하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인생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엄마로 왜곡해 버렸다.

부모는 자식 손을 잡고 문턱을 넘어주기도 하지만 거대한 문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부모란 문턱은 넘다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 되고 딛고 넘으면 디딤돌이 되는 그런 존재인가. 우리는 서로가 넘어야 할 문턱을 가지고 산다. 자식은 지상에서 넘어야 할 가장 높은 문턱인지 모른다. “억센 뿌리를 키운 벌판”이 어미란 걸 모른다 해도 외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군대라도 다녀오면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겠지. 멀리서 연병장의 깃발이 펄럭인다. 무거운 분위기와 함께 입소자들의 얼굴이 파리하다. 훈련병들의 사고 소식이 스쳐 간다. 야간 행군에 참여했다가 사고를 당한 일이며, 비인간적인 처우와 폭언을 못 견뎌 스스로 목숨을 버린 사건이 두렵게 한다. “아들아, 믿는다.”를 복창할 땐 여기저기서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아들 손을 꼭 잡았다.

지금 견디는 훈련이 사는 동안 극한의 상황에서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작은 키가 저 문턱을 넘어 되돌아 나오는 날 성큼 자라있었으면 좋겠다.

문턱은 아무나 들여보내지 않는다. 넘는 법을 아는 자만이 넘어간다. 편견의 문턱에선 곧잘 뼈가 접질려 상하기도 한다. 자존심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차마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려야 그나마 목구멍이 따뜻해진다. 좁은 문조차도 걸려 넘어지기 일쑤고 허리 굽히는 법을 먼저 가르치는 게 문턱의 이치다. 해 떨어지면 문턱에 대고 헛발질하다가도 아침이 되면 순해지는 자신을 돌아보며 헛웃음 짓는 일이 인생살이라는 것을 아들도 살면서 알아가겠지.

어릿광대가 천만 길 낭떠러지 위에서 외줄을 탄다. 아래는 넓고 깊은 강이다. 금방이라도 발을 헛디뎌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아 오금이 저리다. 심장이 아프면 내 몸의 혈 자리가 아프듯이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혈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온다.

아들 방문을 열었다. 한동안 여닫지 않아 그런지 걸쇠가 삐걱거린다. 쇠와 쇠가 맞닿는 부분이 뻑뻑해졌다. 기름칠을 해줘야 부드러워질 텐데 군대에선 조임쇠만 혹독하게 조여서 아들의 숨통이 막히는 건 아닐까. 불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을 아들 마음이 짐작돼서 지난 밤 꿈이 더 생생하다.

“잘 지내고 있음.” 아들이 보낸 편지다. 아들이 부모와 나누는 언어는 늘 짧다. 여섯 글자를 두고 나름대로 해석한다. 딸아이는 재미있다고 깔깔거리고 남편은 심한 훈련은 시키지 않으니 정말 잘 지내고 있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엄마, 집에 빨리 가고 싶어.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훈련병들의 사진이 훈련소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제복 입은 아이들의 풍경이 낯설다. 한 주 전만 해도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입소하던 아이들은 보호가 필요해 보였었다. 제법 야물어 보이고 의젓해졌다. 앞줄에 안경 쓴 아이도 문턱 넘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았는지 야위고 거무튀튀해졌다. 마음이 짠하기도 했지만 대견하기도 했다.

베레모를 하늘로 던지는 아이들의 함성이 떠들썩하다. 부모들은 문턱을 잘 넘은 자식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마음 졸이던 시간도 뒤숭숭한 꿈자리도 끝이다. 부모의 마음이 조급하다. 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을 찾아 벌떼처럼 문턱을 넘어 들어간다. 나도 그들 틈에서 아들을 찾는다. 여자 손보다 곱던 아이의 손이 거칠고 여기저기 터져 있다. 안쓰러움에 손을 꼭 잡았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씩 웃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훈련소를 다녀온 후로는 어른스러워졌다. 옥수수같이 몇 겹의 문으로 닫혀 있던 아이였다. 한 풀 벗기기도 힘겨워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온종일 같이 있어도 “네, 아니요.”만 하던 아이가 조금씩 비밀 파일을 열려 한다.

나는 안다. 손이 부르트고 무릎이 까지도록 노력한 만큼의 문턱만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문턱이 있다면 미결로 남은 아들의 마음 턱을 넘는 일일 것이라고 독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