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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 김애자 - 2012년 창조문학신문사 신춘문예 당선작

테오리아2 2022. 9. 27.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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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하룻밤을 지낸 소화라는 후궁의 기다림이 꽃이 되었다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옛날에는 양반집에만 심는 귀한 꽃이지만 지금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출처도 분명치 않은 능소화 한 그루가 대문 옆에서 똬리를 틀더니 곁눈 한번 주지 않는 향나무 허리를 뱀처럼 휘감는다. 목걸이를 한 암캐의 부러움을 딛고 하늘을 감을 태세로 올라가는 줄기마다 처녀의 볼기짝 만한 꽃잎이 요염하게 웃는다.

6월이 되면 능소화와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집 안에서 얌전히 피라고 줄기를 담장 안으로 옮겨 놓으면 잽싸게 문밖으로 나가 서성거린다. 까치발로 목을 빼고 누군가 하염없이 기다리다 소리 없이 떨어진다.

한 여름의 태양을 이고 의기양양하게 떨치는 능소화의 화려함은 여인네의 치마 속까지 무단횡단하며 본능을 부추기다 가을의 문턱에서 서서히 꼬리를 내린다. 흐드러지게 유혹하는 붉은 능소화의 관능과 교태 따라 딸들이 집을 나간다는 속설 때문에 과년한 딸이 있는 집은 능소화를 심지 않는단다. 다행히도 아들만 두었다는 이유로 여름 동안 대문을 장악하도록 묵인한다. 태양의 정열과 주홍빛의 화려함을 보고 있노라면 잊혀가던 본능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다.

 

어릴 적 동네 한 곁에 붉은색 칠을 한 홍살문이 있었다. 좌우에 기둥은 세워져있지만 지붕이 없고 斜籠(사롱)만 얹어 놓았다. 홍살문은 효행과 여성의 절개를 중시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효자나 열녀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포상이다. 한번 받으면 대를 이어 신성한 위엄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

 

 

 

홍살 문 뒤 기와집에는 머리를 쪽 지은 안동 댁과 고운 자태의 정실이라는 며느리가 살았다. 절개를 지킨 고부에게 내려진 홍살문과 기와집은 식솔들이 없어 두 여인이 살기에 크고 을씨년스럽다.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문중 제사 때만 낯선 남정네들이 드나든다. 홍살문의 위력 때문인지 동네 사람들은 두 여인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어쩌다 안동 댁이나 정실이와 마주치면 나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목례를 했다. 어머니 또래의 여인네들은 정실이의 고운 자태를 질투하거나 여성의 욕정이 똬리 틀지 못하게 허벅지에 낸 상처를 입방아에 올렸다.

정실이네 기와집 대문 위로 능소화가 고개를 내민다. 다 피우지 못하고 떨어지는 꽃잎 속에 본능을 삭이기 위한 고행이 붉게 묻어난다.

 

정실이네 능소화가 흐드러질 즈음이면 총총거리는 별과 달의 밀애가 더 애처롭다. 이맘때면 고운 풀에 먹인 이불 홑청이나 삼베를 놓고 안동 댁과 정실이의 다듬질이 시작된다. 똑딱 똑딱 고부의 다듬질은 조심스럽게 밤의 적막 속으로 들어온다. 처음에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기 위해 조율하는 현처럼 어설프다. 두 박자에서 한 박자로 이어지는 방망이의 리듬은 반박에서 점점 더 짧게 리듬을 탄다. 신들린 것처럼 트레몰로에 이르면 별도, 달도, 반딧불이도 추상화를 그리며 무아지경으로 몰려가고 느리고 무거운 콘트라베이스가 홍살문 뒤에서 본능의 한숨을 토해낸다. 날카로운 바이올린의 고음에서 외로움이 절정에 이르고 팀파니의 격렬한 몸부림이 더해지면 애욕과 교태를 숨긴 고부의 영혼은 리듬을 타고 자유의 날갯짓을 시작한다. 여인의 소리가 담장을 넘어가서 안 된다는 굴레를 비웃으며 소슬 대문 위에 훌쩍 올라앉은 능소화 귀뿌리에 입 맞추고 훨훨 날아간다. 한낮의 정사를 치르고 포만감에 늘 부러진 들녘을 휘돌아다니다 보름달을 향한 수캐의 세레나데에 반주를 맞추기도 하고, 눈꺼풀이 내려오는 누렁이 귀 볼도 간질인다. 클라이막스에 이를 즈음 자유의 여신(女身)들은 통통하게 살찐 능소화의 볼기짝을 어루만지고 귀가한다. 본능을 실은 다듬질 오케스트라의 외출은 후줄근하게 젖어들던 고부의 아픔을 곰삭혀 준다.

남정네의 욕정은 자랑이지만 여인네는 본능을 숨겨야 한다. 홀로된 아낙의 붉은 피는 살아 꿈틀거려도 차가운 현실 속에서 못다 핀 꽃으로 떨어진다.

 

시어머니는 한국전쟁 막바지에 남편의 전사통지를 받았다. 한밤중에 찾아와 갓 태어난 핏덩이를 홀연히 바라보다 사라진 것이 생전의 마지막이었다. 20대 초반에 아들 둘을 데리고 어머님은 생존의 전쟁터로 들어갔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허드렛일을 자청했으나 세 식구의 배고픔을 달래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쩌다 행운처럼 다가오는 일거리라도 남정네의 본능이 보이면 서둘러 눈을 피했다. 허기보다 지독한 본능이 행여 고개를 내밀까 두려웠던가? 나라가 인정하지도 가문이 알아주지도 않는 홍살문을 스스로 세워 굳게 담장을 친다. 외간 남자의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해 곁눈질하던 습관이 표정에 각인되어버렸다고 한숨을 지으신다. 누구든 곁눈질하는 것을 싫어하시기에 며느리 될 나를 처음 봤을 때 곁눈질하지 않아 좋았단다. 세월에 절여진 여인의 한이 담겨 있어 가슴 한복판이 아리고 시리다.

 

어머님의 다듬질에서도 정실이 고부의 다듬질과 비슷한 음향을 만난다. 정실이네 다듬이가 애욕을 마음껏 풀어내는 폭풍의 소리면 어머님의 다듬이는 꺽꺽 북 받히는 설움을 첼로 소리에 곰삭혀 내는 자제력이 있다. 이성과 본성을 자맥질하는 젊은 육체의 흐느낌이 비올라의 느린 음률이 되어 다가온다. 새끼를 키우는 어미의 처절한 절제는 본능을 잠재우기 위해 허벅지를 찌르는 여유도 주지 않는다. 폭풍의 세월 동안 한창 물이 오른 여신(女身)을 다듬질에 묶어 조금씩 석녀로 만들었다.

능소화의 손이 향나무에 매달려 교태를 부린다. 아들 내외가 뒤엉기어 낯선 풍광을 연출할 때도 여인이기를 절제하시는 어머님의 여신(女身)이 애처롭다. 연세가 쉰을 넘겼을 때 조심스럽게 재혼 이야기를 꺼냈으나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 봐 한사코 마다하셨다.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 교회에 가시기 위해 곱게 화장을 하시고 연한 립스틱으로 마무리한다.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여심은 관능보다 더 무서운 본능이다. 어머니이기 전 애욕의 관능을 가진 여인이셨음을 외면했던 자식들의 불효도 치마폭에 숨기고 옷깃을 여민다.

걸음이 자유롭지 못한 육신은 마른 풀잎처럼 흔들거리지만 세월에 묻혀오는 여인의 진한 향기는 능소화보다 강렬하고 아름답다.

 

정실이의 대문 위에서 다 피우지 못하고 떨어진 능소화를 안타깝게 줍던 기억이 붉게 떨어진다.

어머님의 옷고름 사이에 숨어 다 피우지 못한 꽃잎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어머니가 여인이었음을 깨치지 못한 회한과 죄스러움이 능소화가 되어 우두둑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