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꽃구경/김근혜

테오리아2 2022. 2. 18.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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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의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개나리의 봄 편지를 기점으로 시샘이라도 하듯 벚꽃, 철쭉, 라일락이 이어달리기한다. 겨울잠을 털고 폴짝폴짝 건반을 두드리는 개구리의 경쾌한 리듬이 잠자던 꽃들을 깨운다. 여기저기서 봄나들이 오라고 손을 까딱인다. 이런 유혹이라면 얼마든지 빠져도 좋을 것 같다. 어花, 봄봄, 둥둥.

유채꽃 축제로 들썩이는 낙동강변에 섰다. 행사를 알리는 패러글라이더들의 활공이 색색의 홀씨가 여행하는 듯하다. 노오란 파도가 물결치는 유채꽃밭에서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아름다워서 슬프기까지 한 꽃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잠시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이 되어 본다. 설핏 첫사랑의 향기가 코끝에 닿는다. 어花, 봄봄, 둥둥.

낙동강 물줄기도 봄의 향연에 두근거리는지 내 마음보다 더 일렁인다. 하이얀 나비 떼가 노오란 꽃잎을 물고 사랑을 속삭인다. 살포시 눈을 감은 잎사귀 위로 상그르르 맺혀 있는 이슬방울들, 인기척에 놀라 얼굴색이 샛노랗게 변했다. 어花, 봄봄, 둥둥.

앞서가던 노부부의 꼭 잡은 손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삶의 길에서 강약이 있고 농담이 있고 명암이 있었을 터이지만 누적된 행복감이 묻어난다.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부러운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추고 움직임 하나하나를 살핀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작은 바람도 생긴다. 눈에 보이는 고운 것에 홀려 진정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았나 보다. 그 노부부의 느티나무같이 든든한 모습이야말로 어느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거늘. 어花, 봄봄, 둥둥.

꽃을 보고 잠시 황홀경에 침미해진다. 눈을 사로잡는 것은 비눗방울이 부유하다 일순간에 툭 터지고 마는 현상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마음을 좇게 된다. 나약한 인간이라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어花, 봄봄, 둥둥.

중국 4대 미인을 일컬어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라 했다. 침어낙안은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고,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갯짓을 멈춘 채 땅으로 떨어졌다는 말이며, 폐월수화는 초선의 미모에 달도 수줍어서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고 양귀비의 아름다움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는 이야기이다. 찬사 중에서도 극치가 아닐까. 미려함에 빠지는 것은 군주나 범인이나 다를 바가 있으랴. 어花, 봄봄, 둥둥.

꽃구경은 같되 자연이 주는 꽃은 마음을 감동하게 하고 해어화(解語花)는 사람을 혼미하게 한다. 말을 하는 꽃에 미혹된 몇몇 군주는 선경을 헤매다 망국을 면치 못했다.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손에 넣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마련이다. 인간의 본능이 아니런가. 해어화로 인해 빚어진 불행한 역사는 지난날을 거울삼아 몸과 마음을 살피게 하는 반면교사의 좋은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어花, 봄봄, 둥둥.

매월당 김시습도 장미의 아름다움에 애간장이 녹는다며 ‘뇌쇄(惱殺)’라는 표현을 빌렸다. 꽃이야말로 신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 가장 화려하고, 요염하며 우아한 향기를 가진 가희가 아닐까. 옆에선 연인들이 추억을 담느라고 손 전화를 연다. 길손을 불러 셔터도 부탁한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된다. 신께 감사의 고개가 절로 수그러진다. 어花, 봄봄, 둥둥.

보통 때에는 몇천 원이면 먹을 수 있던 파전이 만 원을 넘어선다. 꽃밭에서는 누구나 성자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음식점들의 바가지요금이 축제에선 더욱 기승을 부린다. 음식점들의 밉살맞은 횡포에 불쾌했던 마음이 꽃을 보는 순간 스르르 녹아든다. 어花, 봄봄, 둥둥.

꽃구경 온 사람들이 낯설지가 않다. 손이라도 잡고 싶어진다. 이렇게만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시름을 잊고 축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탄성이 절로 새어 나온다. 어花, 봄봄, 둥둥.

꽃은 가난한 영혼을 지닌 자들에게는 낙원이다.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주고, 슬픔 가운데서 기쁨을 선사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는 엄마 같다. 그런데 나는 세상 욕심에 붙들려 내놓은 게 없다. 어花, 봄봄, 둥둥.

남지 철교 위에 전시된 흑백사진 속에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역사가 비석처럼 서 있다. 포탄을 맞아 허리가 꺾인 철교는 민족 분단의 비극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미처 다리를 건너지 못한 피란민들의 울부짖음 속에 엄마도 있다. 남지철교는 그들의 엇갈린 생사를 애타게 묻는다. 어花, 봄봄, 둥둥.

눈을 감는다. 꽃향기에 묻혀 엄마 냄새가 난다. ‘남북이산 가족 찾기’는 엄마 삶의 일부였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은 끊어내지 못할 가슴앓이였다. 소식이 없자 지주로 산 것이 큰 화를 입은 모양이라고만 했다. 그 아픔이 너무 큰 때문이었는지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지기도 전, 마흔 몇 해에 서둘러 천상의 꽃이 되었다. 어花, 봄봄, 둥둥.

꽃은 요절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가슴에 더 오래 담아두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의 인생도 한 송이 꽃에 불과했다. 짧게 살다간 안타까움에 더욱 보고 싶은 것이리라. 경국지색이라 불렸던 미인들도 생김새만큼이나 총애를 받으며 화려한 생을 누렸지만 백 년을 살지 못했다. 어花, 봄봄, 둥둥.

인생이 열흘 붉은 꽃과 다를 게 무엇이랴. 봄마다 부활하는 꿈을 꾸지만 꽃은 꽃이로되 꽃이 아님을 안다. 온갖 보화가 가득해도 지킬 수가 없고 마지막 가는 길엔 한 푼 물고 가지 못하는 게 인생이다. 그런데도 잠시 머물 이 세상, 천 년이나 살 것처럼 아등바등하며 몸부림친다. 오래 살고자 아무리 애써도 목숨은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다. 결국엔 꽃구경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난다. 어花, 봄봄, 둥둥.

사람과 달리 꽃은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늘 그 자리를 지키지만 불평하지 않고 최상의 꽃을 피워 기쁨으로 되돌려 준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다. 사람들은 내 배만 채우려 든다. 그럴수록 마음만 고프다는 것을 알까. 어花, 봄봄, 둥둥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이라고 했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아름다운 꽃 앞에서 천하장사인들 힘자랑을 할 수 있을까. 꽃의 운명을 보며 부린 욕심도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욕망이 무거울수록 생은 무겁다고 이 꽃 속에 푹 파묻혀 벌거숭이로 있고 싶다. 어花, 봄봄, 둥둥.

믜리도 괴리도(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욕망조차도 이 꽃에 다 묻고 가고 싶구나. 어花, 봄봄, 둥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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