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 1547

바이올렛/한경희

오후 햇살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바이올렛 화분에 골고루 비칩니다. 봄맞이로 뭘 들여놓을까 고민하는 제게 화원에서 바이올렛을 추천해주었습니다. 물을 자주 줄 필요가 없고 생명력이 강하다면서요. 저처럼 게으른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싶어 색깔별로 담아 왔습니다. 주인은 마치 큰 기밀이라도 발설하는 양 속닥였지요. “잎사귀를 떼어서 흙에 꽂아두기만 하면 번식이 돼요.” 속는 셈 치고 두툼한 잎 다섯 장을 골라 빈 화분에 꽂았습니다.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었어요. 화원의 말과 달리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기르는 사람이 두어 번 물 준 것 말고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저 미물도 알아챘을 테지요. 식물도 사랑을 주면 꽃과 열매를 더 튼실하게 맺는다잖아요. 볕이 따가워지기..

나무 숲‧수필의 숲 /황소지

허리 수술 후 회복기에 접어들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해서 매일 대신공원을 찾는다. 처음에는 집안에서 5백 보씩 1주일 걷고, 다음은 1천보씩 1주일 걷다가 가까운 구덕산 밑에 있는 공원을 찾게 된 것이다. 남편은 일찍 퇴근해서 걷기 운동을 하루도 쉬어서는 안 된다며 내 손을 끌며 앞장을 선다. 공원 입구에는 자갈이 듬성듬성 박힌 흙길이 정갈하게 닦여 있다. 길 옆 산비탈 바위 틈새에는 철쭉꽃이 피어 있고, 다른 한쪽은 사철나무가 알맞은 높이로 손질되어 있다. 공원에는 1백 년 이상 된 삼나무 수백 그루가 쭉쭉 뻗어 있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잡목들이 층을 이루며 푸른 잎새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길을 따라 조금 거닐면 숲은 싱그러운 나무 향으로 가득하다. 길모퉁이를 돌면 꽃 향기가 코끝을 스치기도 하..

구두와 고무신 / 최병진

엄마 손을 잡고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엄마가 있어서 괜찮았다. 어른들 말을 들으니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인민군이라고 했다. 인민군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인민군에 발각되지 않게 조심조심 빙판길을 걸어야 한다고 엄마는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가죽 구두 굽에서 들리는 “똑똑 딱딱.” 소리가 골짜기에 더욱 크게 울렸다. 아버지가 사주신 구두였다. 한 짝이 언제 없어졌는지 쭈그려 신은 한쪽 발에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구두 소리에 화를 내며 잰걸음으로 앞질러갔다.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욕을 먹으며 길을 걸었다. ​ 밤하늘에 별들은 잠도 없는지 초롱초롱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엄마 등에서 동생도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엄마는 앞서가는..

햇빛 마시기/최원현

“마셔 보세요!” k원장이 내놓은 것은 투명한 유리잔이었다. 묵직했다. 그러나 무얼 마시라는 걸까. 유리컵 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셔보세요!” 다시 독촉을 해왔다. “오전에 제가 한 번 마셨으니 가득 차 있지 않을 지도 몰라요.” 컵을 입으로 가져가 ‘훅’ 하고 들이마셔 봤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햇빛이에요” 그녀의 설명이었다. 내가 지금 마신 건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둔 것이란다. 좀 맹랑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햇빛을 내 속으로 들여보내준다? 그러면 내 속에선 어떻게 반응할까. 갑자기 들어온, 아니 한 번도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한 밝음이 어둠 속의 그들에게 순간적으로 다가갔을 때 어떤..

겨울 연지에서/신일수

시내에서 남쪽으로 8킬로쯤을 벗어나면 예하리 라는 작은 마을에 연못하나가 있다. 연못이라면 농경지 수리이용 때문에 마을 뒤편에 하나쯤 엎드려 있게 마련이지만 내가 찾아가는 곳은 이와 품격이 다르다. 제방에 들어섰을 때 늙은 팽나무와 움츠린 노송들이 찬바람에 수군거리고 못은 가슴 속을 드러낸 채 허탈한 눈만을 뜨고 있었다. 바로 이 못이 내가 즐겨 찾는 연지 이다. ​ 삼천여 평은 실히 넘을 것이다. 못가엔 서걱이는 갈대 잎 소리가 일어서고 말라빠진 연꽃 대궁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다. 청둥오리 몇 마리가 쏜살같이 날개를 턴다. 하늘빛이 고웁다. 꽃을 피워 맺은 연방이 이미 식용, 약용으로 꺾이고 지금은 얼음위에 누워버린 연잎과 줄기들이 파수병처럼 서서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 나는 버릇대로 제방의 끝에..

세수 /정승윤

그 시절엔 거지가 흔했다. 그때는 거지들이 탁발승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다. 곡식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먹던 밥을 퍼주었다. 어머니가 거절하는 경우는 대개 거지가 아침 식전에 온다거나, 멀쩡한 사람이 구걸을 다니는 경우였다. 거절하면 말없이 조용히 가는 사람도 있었고 문간에 붙어 서서 떼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전후에 생긴 고아 거지들도 많았다. 그 애들은 대개 깡통을 들고 다녔다. 길거리에, 다리 밑에, 사직공원 정자에 거지들이 득실득실했다. 거지를 보지 않고 지나는 날이 드물 정도였다. 양지 녘에 거지 남매가 쪼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던 기억도 있다. 몇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서 얻은 밀가루인지, 조그맣게 반죽을 하여 떡 모양도 빚고 국수 ..

빈 듯 찬 듯/최민자

5년 넘게 땅속에서 묵었을 매미 소리를 모카커피에 타서 마신다. 오늘 아침 내 특제 메뉴다. 매미 소리는 먹기 좋게, 적당히 분절되어 커피 잔에 녹아든다. 어떤 소리는 튜브에서 쥐어짜듯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어떤 소리는 톰방톰방 방울져 떨어진다. 짝에게 닿아야 할 노랫가락을 내 잔 속에 빠뜨렸으니 녀석들은 끝내 짝짓기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나온다. 파가니니인지 텔레만인지, 얼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려나,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스쳐 가는 바람에 연연하지 않는 늙은 나무처럼 나도 이제 무엇을 오래 붙들지 않는다. 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게 하고 흘러가는 것들은 흘러가게 놔둔다. 기억해 봤자 금세 잊고 말 터, 대지한한 소지간간(大知閑閑 小知間間, 큰 앎은 느긋하지만 작..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박완서

길을 떠나면 되돌아 와야 한다. 길 떠날 때는 즐겁고 신이 나지만 돌아올 때는 초조하고 스산하다. 명절 때도 귀향길보다도 귀경길이 더 정체가 심하고 사고가 많이 나는 것도 이런 조바심 때문일 듯싶다. 떠난 길을 되돌아오려면 U턴 지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 지점은 길 위일수도 있지만 고향집이나 유원지나 명승지일 수도 있다. 우리 인생행로에도 U턴 지점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사십대까지 앞만 보고 살았다.가구나 가전제품만해도 우리 집에 그게 정말 필요한가보다는 남들도다들 그런 것들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장만할 이유가되었다. 물건만이 아니라 먹는 것까지도 그랬다. 요리책을 참고로 식단을 짜고 아침에는 밥 대신 빵을 먹었다. 삼시 밥을 차린다는게 억울했고 아이들의 입 맛도 그렇게 보수적으로 길들..

풍진이/최정임

개가 짖습니다. 낯선 이가 지나가나 봅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채마밭에 한 여자가 허리를 숙이고 서 있습니다. 뒷 절은 산 모양대로 앉은 암자여서 계단식 구조입니다. 학교 울타리를 지나면 예쁜 열무밭, 배추밭. 그리고 어른 키만한 옹벽 위에 풍진이가 지키는 작은 절 마당이 있습니다. 오늘도 그 마당 한켠에서 진회색 몸뻬 입은 아줌마가 푸성귀를 다듬고 있지만 풍진이는 예사로운 집안일이라는 듯 그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채마밭의 나그네를 향해 귀를 세우고 서 있습니다. ​ 개 집 옆 감나무 두 그루가 화려한 가을단장을 마무리한 후 지난 주 내내 알록달록한 잎사귀를 멋쟁이 옷깃 세우듯 치켜든 채 실눈 뜨고 풍진이를 내려다보더니 주말 지내고 출근하니 헐렁헐렁 힘이 빠져 있습니다. 간밤에 다녀간 초겨울 비에 야..

뙤약볕/ 윤춘신

내 나이 아홉 살 무렵,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했었다. 외가에서 맨 처음 배운 일이 아궁이 불 지피는 일이었다. 아궁이에서 뭉글대는 연기가 꾸역꾸역 기어 나오면 외할머니는 부지깽이를 내 손에 쥐어줬다. 내가 아궁이 앞에서 풍구를 돌리며 불길을 잡고 있을 때, 외할머니는 우물에서 물을 가득 담은 대접을 들고 들어왔다. 물 대접은 부뚜막 위에 올려졌다. 외할머니는 물 대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사악 사악 쓱쓱 사삭 사삭. 월남 간 우리 진호 지발 덕택에 지발 덕택에…. 사악 사악 쓰슥 삭삭. 나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외할머니 손바닥 비비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 소리는 가을 아침, 겨울 아침까지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 겨울은 배고프고 심심했다. 외할머니 빈 젖을 물고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