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아홉 살 무렵,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했었다. 외가에서 맨 처음 배운 일이 아궁이 불 지피는 일이었다. 아궁이에서 뭉글대는 연기가 꾸역꾸역 기어 나오면 외할머니는 부지깽이를 내 손에 쥐어줬다. 내가 아궁이 앞에서 풍구를 돌리며 불길을 잡고 있을 때, 외할머니는 우물에서 물을 가득 담은 대접을 들고 들어왔다. 물 대접은 부뚜막 위에 올려졌다. 외할머니는 물 대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사악 사악 쓱쓱 사삭 사삭. 월남 간 우리 진호 지발 덕택에 지발 덕택에…. 사악 사악 쓰슥 삭삭. 나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외할머니 손바닥 비비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 소리는 가을 아침, 겨울 아침까지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
겨울은 배고프고 심심했다. 외할머니 빈 젖을 물고 살던 두 살배기 내 막내 여동생은 외할머니 품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다섯 살 먹은 여동생과 나는 찐 고구마 말려놓은 소쿠리를 가지고 실랑이했다. 둘이서 머리를 처박고 소쿠리 테두리에 들러붙은 찐 고구마 조각까지 다 뜯어먹고도 배가 고팠다. 나는 배고프다는 소리를 줄창 해대고, 외할머니가 폭폭 해서 살 수 없다던 겨울이 한걸음씩 뒤로 물러서던 때였다.
외할머니는 말했다. 너거 삼촌이 살아서 돌아온단다. 외삼초이 정말로 살아서돌아왔다. 외삼촌이 가져온 짐 속에는 국방색 깡통과, 속이 휑하니 비어있는 자라 껍데기와, 낙하산, 사진이 들어 있었다. 밤마다 어른들이 호롱불 아래 모였다. 영어로 써진 깡통 속 과자와 고기를 징하게 맛나다면서. 시상에나 어치케 살아왔는가 모르겄소. 워매 참말로 월남은 아무나 가간디…. 갸가 맹호부대랑게…. 베트콩들이 맹호부대를 질루 무서워 항게. 우리 진호가 훈장도 탓당게. 허긴 그려. 갸가 에릴 때부터 쪼깐 거시시 혔어, 긍게 열아홉인가 열여덞인가 군대도 일찍 갔당게, 월남 갈 때 돈도 솔찬히 주고 대려 간다능만. 암만, 그렁게 즈그 아부지 약값도 허고 쪼깐 보태 쓰고 혔응게. 이놈이 그 훈장이랑게. 그랬다. 사진 속 외삼촌은 입을 꾹 다물고 가슴에 훈장을 달고 있었다. 사진 속 훈장은 실제 그것과 똑 같았다. 호랑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이빨을 드러낸 표장과 반짝거리는 별모양이 달린 휘장을 외할머니는 사람들한테 내보였다. 이놈이 그것이여. 훈장을 아무나 타간이. 베트콩 귀떼기를 싹둑 잘라갔고 거시기 했다능만, 질루 잘했응게. 잘했응게. 그랬다.
훈장까지 받아 살아 돌아온 산목숨이 된 외삼촌은 다시 살기 위해 서울로 가버렸다. 외삼촌이 돈만 벌어오면 땅을 사겠다며 외할머니는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속이 아프다며 소다를 한 숟갈씩 입안에 털어 넣던 외할아버지는 외삼촌이 가져온 속이 휑한 자라를 목침 삼아 누워만 있었다. 읍내 장날, 약장수 약을 사러간 외할아버지는 약만 사온 게 아니었다. 담배농사가 돈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온 외할아버지와 부쳐 먹을 땅조차 없다며 푸념을 하던 외할머니는 텃밭이라도 담배 농사를 지어야지 별수 없다고 했다. 외할머니를 따라 밭고랑을 다니면서 나는 신이 났다. 담배 농사가 잘되면 꼭 신고 싶었던 왕자표 운동화를 사 달라고 해야지 마음먹었다. 담배는 나보다 키가 컸고, 담배잎은 서너 개만 따도 두 팔 가득 넘쳐났다. 담배잎을 따 나르는 동안 땀으로 범벅되기는 발가락도 마찬 가지였다. 찐득거리는 고무신이 밭고랑에서 자꾸만 벗겨졌다. 담벼락에 기댄 채 담배잎을 엮는 외할아버지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배 아프다는 외할아버지도, 볕 좋을 때 잘 말라야 돈이 된다며 서두르는 외할머니도, 문고리에 기저귀 끈으로 허리를 묶인 채 기어 다니는 막내 동생도, 심심하다며 땅마닥만 긁고 앉아 있는 둘째 동생도 해질 때까지 서로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날 밤, 외할머니는 너거 어메한테 편지 쪼깐 써야겠다고 말했다. 방바닥에 엎드려 서울 간 엄마한테 글 모르는 외할머니 대신해 편지를 썼다.
"행이 보아라."
"해앵이 보오아아라. 그담엔 뭐라고 써?"
"너거 새끼는 잘 있다."
"너어거 새에끼이느은 자아알이 있다. 그담엔?"
"아부지가 아픈 게 돈 쪼깐 보내야 쓰겄다."
"아아부우지이가아 아아프은게 도오온 쪼오까안 보오내에야아 쓰으거었다."
연필심을 꾹꾹 눌러가며 쓴 편지를 엄마는 받아볼 수 없었다.
우표 부칠 돈으로 나는 역전 앞 만화방에서 코를 박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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