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이박스 안에는 기타가 하나 걸려 있었다. 그것은 디제이 형이 가장 아끼는 보물1호였는데, 헤드 부분이 F자 모양으로 멋진 곡선을 이루고, 바디 아래쪽에 ‘펜더(Fender)’라는 글씨가 박혀 있는 전자기타였다. 그는 디제이박스 안에서 틈만 나면 기타를 꺼내 깨끗한 수건으로 정성 들여 닦곤 했다. 그리고 어떤 기타리스트가 펜더를 사용하고 또 어떤 기타리스트가 깁슨을 사용하는지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깁슨과 펜더의 소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직접 판을 틀어주며 우리에게 비교해주기도 했다. (……)
다방 문을 여는 순간 안에서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디제이박스 안에서 나는 기타 소리였다. 입구에서 힐끗 쳐다보니 디제이 형이 앰프에 선을 연결해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어깨끈까지 멘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 멋진 머리를 흔들어대며 연주에 몰입해 있었다. 팽팽한 가죽바지 위로 기타를 길게 늘어뜨리고, 피크를 쥔 손은 지판 위를 마구 달리고 있었다.
순간, 나는 긴장했다. 디제이 형이 기타를 치다니! 손가락 관절이 다 부러져 무공을 폐했다는 그 전설의 무림고수가 드디어 칼을 뺐구나, 싶어 나는 조용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생판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척 듣기에도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곡인가 싶어 쫑긋 귀를 세워보았지만 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한참 듣다보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코드도 맞지 않았고 스케일도 엉망이었다. 그냥 마구잡이로 뜯어대는 소음에 불과했던 것이다. 디제이 형은 한껏 기분을 내느라 내가 온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
나는 여종업원과 대충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디제이박스 안에 들어가 음악을 틀었다. 하지만 엉뚱한 데 신경을 쓰느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여종업원이 주방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며 홀 쪽을 연신 힐끔대며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가고 홀이 텅 비자,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펜더기타를 집어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기타를 케이스에 넣는 손이 마구 떨렸다. (……)
당시 펜더기타는 대학 입학금보다 더 비싼 가격이었다. 나는 그 기타를 낙원상가에 가지고 가서 팔 작정이었다. 핑계이긴 하지만, 당시 나에겐 절실하게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코드도 모르는 디제이 형에겐 펜더기타 같은 명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에게 느낀 일종의 배신감이 더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평소에 나에게 잘해준 디제이 형에겐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다.
종각역에서 내려 기타를 메고 낙원상가를 향해 걸어가다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데, 그 와중에도 갑자기 내가 뮤지션이라도 된 듯 기분이 근사했다. 나는 전에 디제이 형을 따라 몇 번 와본 상가를 천천히 구경하며 ‘중고취급’이라고 씌어 있는 한 가게로 들어갔다. 내가 가져간 펜더기타를 주인이 살펴보는 동안 나는 가게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악기들을 구경했다. 옆에선 한 무리의 사내들이 뭔가 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며 악기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나같이 디제이 형처럼 머리를 기른 데다 가죽바지를 입고 있어, 한눈에도 뭔가 한가락씩 하는 뮤지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선망의 눈길로 힐끔거리며 주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원 쳐줄게.
한참 물건을 살펴보던 가게 주인이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멍한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펜더기타면 중고가격도 새것과 별반 다르지 않고 심지어는 중고가 더 비싼 것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명기의 특징이라고 했던 디제이 형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거 펜던데……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에 말끝을 흐렸다.
―펜더 맞아. 짜가 펜더.
주인은 옆에 머리를 기른 청년과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이게 짜가라고요?
―응, 살 때 얼마 주고 샀는데?
―산 게 아니고 그냥 선물받은 건데…… 여기 헤드 부분이 에프자로 휘어졌잖아요. 그리고 여기 로고도 있는데……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긴 머리의 사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이 위에 걸려 있는 기타 한번 봐.
주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수십 대의 전자기타가 걸려 있었는데, 바디에 모두 펜더 로고가 박혀 있었다.
―저거 다 펜더거든. 근데 한 대에 오만원씩이야. 다 짜가라는 얘기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세상에, 저렇게 많은 펜더가 다 짜가라니!
―어떡할래? 못 믿겠으면 다른 데 갖고 가보든가……
―그냥 이만원 주세요.
얼굴이 시뻘게진 나는 그저 그 긴 머리의 사내들 앞에서 빨리 사라지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돈을 받아가지고 나오는 내 기분은 한없이 참담했다. 이만원밖에 안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훔치지 말걸 그랬다는 후회와, 그게 진짜 펜더였으면 디제이박스 안에 그렇게 허술하게 보관할 리도 없었을 거라는 뒤늦은 깨달음과, 결국 디제이 형한테 또 한번 속았다는 배신감 등이 뒤섞인, 매우 복잡한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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