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 1596

딱, 그만큼/최장순

1. 검푸른 벽이었다. 멀리서는. 그러나 다가갈수록 숲은 훌륭한 배후가 된다. 나무들이 온통 하늘을 덮고 있다.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한 아파트 삶이 아닌가. 때맞춰 걷는 숲. 그늘이 따가운 햇살을 가려준다. 그루터기에 앉아 카메라 렌즈를 통해 올려다본 우듬지들이 예술작품이다. 일부러 그리기도 어려운 수채화다. 아마존 거대한 숲 사이로 이리저리 흐르는 물줄기를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멀찍이서 짐작한 내 착각이 저만치 물러난다. 우듬지들은 서로가 닿지 않게 절묘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하늘을 조각조각 나눈 절묘함. 그 공간을 통해 우듬지 아래의 가지와 이파리에 빛을 나누고 있다. 잘 균열이 된 거북 등을 닮았다. 이리저리 트인 공간 사이로 하늘은 맑고 푸른 기운을 숲 안으로 쏟아붓고..

제9회 공무원문예대전 최우수상/아름다운 원시(遠視) / 김영식

제9회 공무원문예대전 최우수상/아름다운 원시(遠視) / 김영식 어느 날부터 눈이 침침해지면서 책읽기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것들은 자꾸 흐릿해지는 데 눈을 들면 그러나 먼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무슨 큰일인가 싶어 황급히 안경점을 찾았으나 자연스 런 노화현상이니 너무 걱정 말라는 것이었다. 순간 마음이 울적해졌다. 싱그러웠던 내 젊은 날이 늦가을 낙 엽처럼 천천히 나를 떠나고 있었다. 매양 봄이라 생각했는데 어느덧 가을의 끄트머리에 서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붙잡을 순 없을까? 눈이 더 흐려지기 전에 서둘러 안경을 맞추어야겠다고 작정했다. 눈이 차츰 희미해진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는가? 더욱 그것이 노화현상이라니. 세월 앞에선 아무 것 도 무한한 것이 없구나하고 생각했다. 잠시 지나..

회의 미수 사건 / 김삼진

“김 차장, 회의 좀 합시다. 과장들 좀 이리 불러 봐요. 거기 홍 계장, 김 계장도 같이 오고.” 부장의 쉰 목소리다. 다른 부서는 이미 퇴근하여 빈자리가 많았다. 북적대던 사무실은 한산하다. “저는 친구 결혼식에 가야해서….” 말끔한 정장차림의 홍 계장이 양해를 구하며 뒷자리의 부장 눈치를 살폈다. 뒤를 돌아보니 부장이 가도 좋다는 손짓을 한다. 내 앞의 과장둘도 얼굴을 마주보며 망설이는 표정인데 홍 계장에게 선수를 빼앗기자 김 샌 표정이다. 나를 비롯한 간부들이 회의용 탁자로 엉거주춤 모였다. 부장은 다음 주 토요일 퇴근 후에 내장산 단풍을 보러가자고 했다. 술도 한 잔 하고 일박하고 점심 먹고 올라오자는 것인데, 강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의는 따라야 했다. 부장은 각 지점장들에게도 연락해서 올 ..

쇠꽃, 향기 머물다 / 허정진

둥글둥글한 버섯들 군생처럼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시골 마을이다. 한해의 결실을 보고 난 뒤의 들판은 허무인지 여유인지 텅 빈 충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담장 너머 등불처럼 붉게 매달린 홍시가 방학 때마다 외갓집 오고 가는 길목처럼 정겹기만 하다. 숲속 어딘가에서 갑자기 허공으로 높이 날아오른 새가 폐곡선을 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선들선들한 바람이 조붓한 돌담길을 따라 마을을 안내하듯 앞장선다. 오래된 시골집이다. 귀향을 염두에 두고 잠시 머물 거처를 찾던 중이었다. 뒤란에서 불어오는 대숲 바람, 호박넝쿨 타고 오르는 낮은 돌담, 우물가 옆에 돌확이나 숫돌이 주인 잃은 빈집을 지키고 있다. 한때는 올망졸망한 자식들 앞세운 일가족이 등가죽 따뜻하게 살던 집이었으리라. 사람 냄새 들썩거리던 온기..

다리/이상규

혼자 식탁에 멀슥이 앉아 밥 먹는 것이 싫어서 TV 앞에 밥상을 펴고 아내와 조반을 같이한다. 아쉬운 대로 나이 들어 만들어진 대화의 장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상다리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밥상이 자꾸 한 쪽으로 기운다. 나사가 헐거워졌는지 늙은 소처럼 주저앉을까 불안하다. 상을 펼 때마다 다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아내가 나의 반복된 불평에 ‘요즈음 그런 것 수선해주는 목수가 어디 있냐?’는 말만 되풀이 하더니 어느 날 꼭꼭 숨겨두었던 말끔한 새 상을 불쑥 내놓았다. 다리가 튼튼한 밥상의 출현으로 거실에 금세 안정이 찾아왔다. 얼마 전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라는 일본 영화를 보았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자유인이 된 여주인공이 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튼실한..

여행상수/방민

걷는다, 배낭을 등에 매단 채. 발은 앞으로 향하고 눈은 주위를 살핀다. 코로 들이쉬는 공기에는 해초 냄새가 은근하다. 바닷가 모래밭이라 발이 쑥쑥 빠진다. 속도가 느릿하다. 해파랑 길을 걷는 중이다. 길을 안내하는 리본이 마을을 지나서 차도로 향한다. 차도와 나란히 이어진다. 가로등 기둥에도 리본이 달려 있다. 얼마쯤 걷다가 산길이나 마을길로 이어질 것이다. 찻길도 바닷길과 산길이 막힐 때 돌아간다. 차와 나란히 걷는 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불편하고 바로 옆을 스치는 차량도 불안하다. 다른 길이 없으니 잠시 따라 걷는다. 차가 앞에서 왔다 사라지고, 뒤에서 나타나 달아난다. 차창으로 누군가 힐끗 보는 것 같다. 배낭을 짊어지고 스틱을 휘저으며 걸어가는 우리를 보는 그는 무슨 생..

냄새 / 한경희

봄밤이다. 바람이 살랑, 내 블라우스 자락을 부풀린다. 동네 아이들이 떠난 그네에 앉아 고개를 젖힌다. 어둠과 맞닿은 나뭇가지마다 별들이 매달렸다. 밤하늘에는 온통 외로움이 물들어 있다. 세운 무릎에 손깍지를 끼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싶게 한다. 숨을 크게 쉬어 본다. 흘러 다니던 꽃향기가 폐부 깊숙이 빨려든다. 그 속에서 나는 잊고 있던 냄새의 한 끝자락을 붙잡는다. 엄마에게선 항상 달큰한 냄새가 났다. 달달한 과일이 농익은 냄새였다. 고운 분가루를 탁탁 두들려 발라 살 속 깊숙이 그 냄새를 밀어 넣고, 겉은 분내로 은은하게 감춘, 한없이 포근했던 냄새. 엄마의 살 냄새가 좋아서 나는 자주 품에 안겼다. 가슴을 한껏 부풀려 흩어지는 냄새를 붙들었다 맡으면 맡을수록 그 냄새는 더욱 그리워지기만 했다. "..

구월의 봉숭아/이복희

9월이 저물 무렵, 유난히 눈에 밟히는 꽃이 있다. 봉숭아다. 담장 밑, 공원 한 귀퉁이, 동네 길섶에서 웃자라 쇠어버린 봉숭아. 다른 어떤 풀이나 꽃보다도 시든 봉숭아만큼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없다. 여름내 지천으로 피어 있어도 마음 없이 바라보던 꽃, 싱싱한 선홍빛 꽃잎이 어서 꽃물을 들이라고 유혹할 때도 건성 스쳐 지났다. 손톱에 물들이던 여름밤의 설렘을 잠깐 떠올려 보지만 먼 유년의 뜰에 두고 온 꽃일 뿐이다. 하지만 구월에 만나는 봉숭아는 달랐다. 어느새 굵어진 마디와 억센 줄기, 그리고 빛바랜 꽃송이가 비로소 마음에 안겨오는 것이다. 이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고 여름 한철 맛본 꽃의 영화도 사라진, 철지난 봉숭아가 어린 날 나의 유치했던 객기를 떠올리게 해서다. 미처 시들어버리기도 전에 뽑혀졌..

그런 일이 있었다/강철수

20여 년 전 여의도 S문화재단 인문학 강좌의 학생일 때가 있었다. 대부분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노년의 학생들이었지만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해서 교실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한 학기가 끝나면 지도교수를 모시고 현장답사 여행을 떠날 때가 많았다. 입회 5년 차에는 일본 근현대사를 강의한 H 교수를 모시고 일본 규슈(九州)지방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발자취를 둘러보고 왔다. 이듬해인 그해에는 과별 답사 여행은 모두 보류되고 주야간 학생 전원이 국내 답사 여행을 간다고 했다. 마침 그 학기에는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경을 공부하고 있어서 학기가 끝나면 사우디아라비아로 답사 여행을 가지 않을까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우리 교실을 친히 찾아와 두툼한 한글판 코란경 한 권씩을 선물로 준 이슬람 사업가의 ..

빨래를 널며/왕린

길을 가다가도 빨래가 널린 것을 보면 공연히 기분이 좋다. 빨랫줄에 하얀 와이셔츠가 걸려 있으면 더욱 그렇다. 결혼하고 아기를 기다리던 때, 우리는 이층집 바깥 베란다가 유난히 넓은 집에 세 들어 살았다. 아래층에는 부모를 모시고 여섯 살 된 ‘현이’라는 여자아이를 키우는 주인 부부가 살았는데, 그들은 볕 잘 드는 2층에 올라와 빨래를 널어놓고 가곤 했다. 색색의 옷이 널리면 화분 몇 개가 놓였을 뿐인 그곳 풍경이 달라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들이 넣어놓은 빨래를 보면 성이 차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엄마표 빨래줄에 길든 내 눈에 대충 걸쳐 놓은 모양새가 마음에 걸렸다. 남의 옷에 손을 대는 것이 찜찜했지만, 탈탈 털어 주름을 펴고 중심을 맞춰서 다시 널었다. 양말들도 나란히 짝을 찾아 주었다. 부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