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 1547

뙤약볕/ 윤춘신

내 나이 아홉 살 무렵,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했었다. 외가에서 맨 처음 배운 일이 아궁이 불 지피는 일이었다. 아궁이에서 뭉글대는 연기가 꾸역꾸역 기어 나오면 외할머니는 부지깽이를 내 손에 쥐어줬다. 내가 아궁이 앞에서 풍구를 돌리며 불길을 잡고 있을 때, 외할머니는 우물에서 물을 가득 담은 대접을 들고 들어왔다. 물 대접은 부뚜막 위에 올려졌다. 외할머니는 물 대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사악 사악 쓱쓱 사삭 사삭. 월남 간 우리 진호 지발 덕택에 지발 덕택에…. 사악 사악 쓰슥 삭삭. 나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외할머니 손바닥 비비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 소리는 가을 아침, 겨울 아침까지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 겨울은 배고프고 심심했다. 외할머니 빈 젖을 물고 살..

떠떠떠, 떠/정용준

나는 갑자기 잠이 들어. 그러니까 갑자기 잠이 드는 게 내 병이야. '갑자기'라는 시간. 그게 얼마나 무서운 시간인지 너는 모리겠지. 예측할 수도 없고 그래서 대비할 수도 없어. 그 시간은 만나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상황을 고려해주지 않아. 정말, 그저, 갑자기, 잠이 들어버리는 거야. 그런데 그 잠은 말야,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아프지 않아. 보는 것과 달리 무섭지도 않고. 아니, 저녁이 오고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 어둠 속에 누워 서서히 잠드는 정상적인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어. 이 잠은 완벽하거든.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세계에 내 방이 있다고 치자. 이 잠은 그 방에 놓여 있는 가장 편안한 침대에서 잠자다 깨어나는 것과 같아. 그 세계는 이 세계와 ..

二十歲/ 천명관

디제이박스 안에는 기타가 하나 걸려 있었다. 그것은 디제이 형이 가장 아끼는 보물1호였는데, 헤드 부분이 F자 모양으로 멋진 곡선을 이루고, 바디 아래쪽에 ‘펜더(Fender)’라는 글씨가 박혀 있는 전자기타였다. 그는 디제이박스 안에서 틈만 나면 기타를 꺼내 깨끗한 수건으로 정성 들여 닦곤 했다. 그리고 어떤 기타리스트가 펜더를 사용하고 또 어떤 기타리스트가 깁슨을 사용하는지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깁슨과 펜더의 소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직접 판을 틀어주며 우리에게 비교해주기도 했다. (……) 다방 문을 여는 순간 안에서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디제이박스 안에서 나는 기타 소리였다. 입구에서 힐끗 쳐다보니 디제이 형이 앰프에 선을 연결해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어..

혈려짓는 광화문/설의식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은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덕택으로 다시 지어지리라 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의식 없는 물건이요, 말 못하는 물건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도 기뻐도 설워도 아니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할 뿐이다. 오 백년동안 풍우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워도 할 뿐이다. 석공의 망치가 네 가슴을 두드려도 너는 알음[知]이 없으리라마는, 뚝닥닥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

빙긋과 쿡 / 정진권

어제 오전, 김선생은 강의에 꼭 필요한 책이 한 권 있어서 버스를 타고 교보문고엘 갔다. 물론 집을 나서기 전에 지갑을 열어 보았다. 만 원짜리 다섯 장, 천 원짜리 한 장이 얌전하게 들어 있었다. 비싼 책 살 것도 아니니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었다. 책값은 한 권을 더 사게 되어 이만팔천 원이었다. 그런데 책을 사 들고 버스를 기다리다가 친구 한 사람을 만났다. 주유소 하는 강사장이다. “교수님께서 웬일로 여기 서 계시니?” “음, 책 한 권 샀어. 사장님께선 웬일이시니?” 그들은 충청도 먼 골짜기 같은 고등학교의 입학·졸업 동기다. 서울에 그런 사람이 몇 있어서 매달 한 번씩 모여 삼겹살 구워 놓고 소주 한잔씩들을 한다. 회비는 만오천 원. 만 원 먹고 오천 원은 적립을 하는데, 이 회비가 많은 거냐 ..

손,손,손/이상은

수능성적이 발표 나던 날, 아내는 베란다에 서 있었다.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두 손을 꼭 쥐고 바깥만 바라보았다. 아내는 아들을 기다렸다. 제 자리만 맴돌던 아내가 급히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아들 녀석은 거실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현관에서 미적거렸다. 아내가 아들 녀석을 데리고 거실로 들어왔다. 내 앞에선 아들 녀석은 성적표를 내놓지 못하고 한동안 눈만 껌뻑거렸다. 제 어미가 괜찮다고 몇 번이나 타이르고 나서야 아들 녀석은 주머니에서 겨우 성적표를 꺼냈다. 하지만 아들 녀석은 나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움켜쥐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아들 녀석의 성적표를 받아 나에게 대신 건넸다. “이래가지고 대학 가겠냐!”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를 질렀다. 아내가 걱정스런 얼굴로 내 앞..

제2회 블루시티거제문학상/조탁(彫琢)/ 김두선

먼지 덮인 기억을 물고 그 섬이 내 안에서 일어선다. 잊혀진 임을 마주하듯 전율이 인다. 사십 여 년... 까마득히 잊고 살았건만 셀카 봉으로 막 찍어낸 사진처럼 그날들이 선연해진다. 지나간 신문을 정리 중이었다. 우연히 읽게 된 ‘섬 탐방’ 시리즈. 기억이 나를 그곳으로 소환했다. 궁금함이 꼬리를 문다. 동백나무 고샅길은 그대로일까? 마을을 안내하던 동네 어귀 목비는 여전히 그 곳을 지키고 있을까. 닷새간 머물렀던 그 민박집은, 산 위의 황량한 버덩은... 나는, 나의 젊은 어느 날의 아련함에 젖어 전신이 물긋해졌다. 이십 대의 젊은 날, 내 저항의 방식은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는 것이었다. 이것은 반복되는 일상과 이름도 없는 희망을 거절하며 나름 살아내기 위한 내 삶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순간 ..

공자가 전해준 영양제 한 통 / 상재형

제1회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대상 얼마 전 손목이 자꾸 아프시다는 어머니께 정형외과를 가보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며칠 뒤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전화를 드렸더니 기대했던 괜찮다는 말 대신 의사에 대한 불만만 한참을 이야기 하셨다. 이사로 무리를 한 탓에 골관절염이 생긴 것 같다는 진단을 받고 약을 받아왔는데 별 차도가 없어 며칠을 더 병원에 다니셨단다. 어머니 또래의 연세 드신 분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진료받으면서 아픈 손목 말고도 '전신이 좀 쑤시고, 예전 보다 기운도 좀 없는 것 같고….' 하는 등 이야기를 자꾸 했더니 검사결과 아무 이상 없다며 너무 엄살 부리 지 말라고 잘라 말하는 바람에 몹시 속이 상하셨다고 했다. 매년 꼬박꼬박 정기검진을 받는데다 조금이라 도 아프다 싶으면 바로 ..

부채 / 홍정식

고향 집 안방 문 위에는 몇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의 할머니는 모로 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다른 손으로 부채를 부친다. 날은 한여름이다.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다. 아이에게 태극선을 살살 흔들어 바람을 피우고 혹시나 손주에게 달려들 파리나 벌레를 쫓는다. 다정하게 불어가는 바람으로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그득하다. 그 마루 밖으로 아버지가 여동생을 안고 흐뭇하게 보고 계신다. 나는 뭔가 심통이 났는지 섬돌 위에 앉아 땅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찍은 사진이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간 그리고 두 동생이 같이 찍힌 사진이다. 흑백사진이므로 태극선은 검고 희게 나타나 있다. 사진을 찍은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할머니 탈상을 했다. 그 부채는 사라졌으나 그 부채가 한때..

끝물설設 / 한상렬

불볕더위 그해 중국 상해의 여름은 대단했다. 낮에 이어 밤까지 여행 일정은 이어졌다. 수은주가 37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였다. 어디를 가든 흐르는 땀을 닦노라 시선을 제대로 두기가 어려웠다. 한낮 거리는 온통 웃통을 벗은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공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반라半裸의 천국이 중국이다. 그들의 여름나기가 가히 대단하다. 지금 내가 다시금 그 공간에 있다. 연일 불가마 속이다. 체온을 뛰어넘는 불볕더위가 축축 늘어지게 한다. 사람만이 아니다. 옥상 정원에 가꾸어 놓은 화초며, 채소들이 불볕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기 직전이다. 아무리 목을 축여주어도 그때뿐이다. 여름나기가 어려운 건 동물들 또한 매한가지다. 온몸을 털로 무장한 우리집 강아지 복실이는 그렇다 하고 면도한 듯한 복순이 마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