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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꿈 / 박호선

2020년 경북일보 문학대전 금상 한 마리의 거미가 촉수를 세운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까맣게 그을린 서까래 사이에 거미들이 이리저리 줄을 쳐놓았다. 바짝 다가가 거미줄을 살펴본다. 촘촘하니 방사형으로 쳐놓은 그물이 제법 정교하다. 자신의 몸속에서 진액을 뽑아내며 거미줄을 마무리하던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장 틈 사이로 몸을 숨긴다. 덩그런 기와집은 주인을 잃은 채 빈 집이 되어있다. 기와는 부스스하니 윤기를 잃었지만, 아침햇살은 예전처럼 두꺼운 마루에 반질반질 올라앉는다. 삐꺽거리는 마루에 올라 작은방 문고리를 잡는다. 베틀에 앉아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잠시 눈에 아른거린다. 작은방 문을 열어본다. 베틀이 놓였던 자리가 휑하다. 닳아버린 몽당 빗자루 하나가 구석에서 옛 기억을 쓸어내지 ..

고등어의 눈물 / 최순덕

제24회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 시퍼런 바다가 쏟아진다. 탱글탱글 터질 것 같은 싱싱한 고등어가 배에서 바로 집으로 왔다. 스티로폼 박스에 얼마나 꾹꾹 눌러 담았는지 박스가 미어터진다. 고등어 사이사이에 신문지 뭉치를 쑤셔 넣듯 쿡쿡 박아 넣은 한치는 또 얼마나 많은지, 쏟아 놓으니 큰 대야에 가득하다. 제매가 오징어 좋아하는 줄을 어찌 기억하고 있는지 제철 만난 한치를 많이도 보냈다. 맙소사, 작은오빠가 바다 한 귀퉁이를 툭 떼어 보낸 것 같다. 막내 오빠는 고등어잡이 선단의 운반선 조리장이다. 오빠가 전하는 고등어와의 사투는 각본 없는 드라마다. 남항 부두에서 고등어잡이 선단은 새벽바다를 빠져나간다. 본선 한 척과 환한 불을 밝히는 등선 두 척과 운반선 세 척이 모여 여섯 척의 배가 선단을 꾸리고 목 ..

미싱과 타자기 / 김응숙

문은 쉬이 열리지 않는다. 경첩에 박힌 못에 녹이 슬어있고, 자물쇠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꽉 다물고 있다. 푸르고 희끗한 얼룩이 진 열쇠뭉치 중 어느 것도 그 마음을 풀지 못한다. 장도리가 동원되고 작은 해머까지 나선 후에야 경첩이 빠진다. 뻑뻑한 문을 밀치자 매캐한 먼지와 함께 갇혀 있던 시간들이 왈칵 쏟아진다. 방안이 깜깜하다. 손전등을 비춘다. 창문은 장롱과 찬장으로 가려져 있어 햇살 한 줌 들지 않는다. 손전등은 심해의 잠수함 불빛처럼 방안을 훑는다. 커다란 이불더미가 앉아있고 낡은 트렁크를 쌓아 놓은 것이 보인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 방안으로 들어선다. 잡동사니 사이를 헤치고 안쪽으로 다가간다. 이불더미 뒤 구석에 미싱이 보인다. 미싱은 오랜 세월 한 곳에 붙박여 수행을 한..

감또개/이상수

담벼락 아래 어린 감이 여럿 떨어져 있다. 감꽃과 함께 풀 섶이며 길바닥에도 나뒹군다. 지난밤 세차게 불어대던 바람에 그만 버티지 못하고 낙과하고 말았다. 생을 다 살아내지 못한 감또개를 보면 가슴 한쪽이 아릿해진다. 고샅길을 돌아가면 큰 기와집 대문 앞에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다. 봄이면 감꽃이 팝콘처럼 매달려 눈이 부셨다. 여름이면 넓은 그늘에 동네 어른들이 자리 깔고 더위를 피했다. 가을엔 주렁주렁 홍시가 달리고 새들이 몰려들어 나누어 먹었다. 곁을 지날 때마다 어린 나는 감나무를 가진 집이 부러웠다. 간밤에 바람이 불거나 비가 다녀간 이튿날 아침은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아버지가 외양간 아궁이에서 쇠죽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 눈썹 밑에 붙어있는 잠을 비비며 동생과 함께 감나무를 향해 달렸..

자객 / 권현숙

삼월 초입이라 바람 끝이 차다. 겨우내 햇살 못 본 허여멀건 한 내 목덜미에 때 아니게 붉은 꽃 한 송이 맺혔다. 홍매 꽃망울만 하던 것이 순식간에 명자꽃송이만큼 확 부풀어 오른다. 꽃 핀 자리가 불침이라도 맞은 듯 뜨끔거린다. 엉겁결에 당했다. 본능적으로 손이 목덜미께로 향한다. 뜨끔거리는 곳을 찾아 엄지와 검지로 꽉 꼬집어 짜니 개미 눈알만 한 침 하나가 딸려 나온다. 그 순간 가슴 언저리가 스멀거린다. 화들짝 놀라 신들린 무당처럼 풀쩍댄다. 윗도리를 마구 털어대자 꿀벌 한 마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잠시 내 발 옆에서 비칠대더니 곧 생이 끝날 걸 아는지 모르는지 꽁지가 빠져라 달아난다. 행여 성질 급한 꽃이라도 만날까 싶어 들성지로 향했다. 사방을 아무리 휘둘러보아도 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

민들레 피는 골목 / 박현기

마당 귀퉁이 시멘트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민들레가 피었다. 마당뿐만 아니라 사무실 앞 담벼락 밑에도 몇 송이가 무리를 지어 얼굴을 내밀었다. 봄바람 두어 번 스쳤을 뿐인데, 갑자기 어디에서 날아와 저 험한 곳에 뿌리를 내렸는지 모를 일이다. 물도 없고 거름도 없어 가녀리고 왜소하다. 뿌리나 제대로 내렸는지 몇 번을 들여다본다. 저 혼자 생글거리는 모양새가 제법 꽃답지만, 도시의 시멘트 사이에서는 왠지 그 모습이 애잔하다. 그 여리고 앙증맞은 몸매 어디에 그런 강인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는지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온다. 주택가도 아니고 상가지역도 아닌 어중간한 곳에 사무실이 있다. 내 건물은 아니지만, 세입자들이 자주 바뀌는 다른 집과는 달리, 널찍한 마당에 사무실과 창고를 이십여 년째 주인처럼 사용하고 ..

자작나무 숲에서 / 강천

눈 덮인 자작나무숲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 흔하디 흔한 산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해찰궂은 겨울바람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해거름 자작나무 숲은 고즈넉이 숨을 죽이고 있다. 온통 희멀건 세상이다. 우중충한 하늘도, 발을 디디고 선 땅도, 빽빽이 늘어선 나무줄기도 모두 희끄무레하다. 원근이 사라진 유령의 나라인 듯, 농담 옅은 수묵화 속인 듯 아득하다. 소리도, 흔들림도 없는 자작나무 숲에는 어스름한 적막만이 스멀스멀 떠돌아다니고 있다. 태초의 세상처럼 하늘과 땅이 한 덩어리로 엉긴 혼돈 속에 나는 홀로 서 있다. 이 원초적 영역에 새겨질 내 흔적이 혹여 오점으로나 남지 않을까 숨결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나무가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숲 깊숙이 이끌려 든다. 멀리서는 그저 희부옇기만 하더니 줄기는 ..

맨방 / 추선희

집들이를 다녀왔다. 그 집에는 빈 벽이 거의 없었다. 장식가구가 많았고 가구가 없는 벽 앞에는 분재와 도자기가 도열해있고 조명이 가족사진과 그림을 비춰주고 있었다. 터질 듯 꾸며진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니 마음이 산만하고 묵직하다. 몇 해 전 제주도에 갔을 적에 사진작가 고 김영갑의 갤러리, 두모악에 들른 적이 있다. 하릴없이 쏘다니다 우연히 팻말을 보게 되어 찾아간 것이다. 한때 시골 분교였던 갤러리는 아담했다. 틀만 간직한 채 개조된 건물은 수수했고 작은 운동장은 나무와 조각품들로 아기자기했다. 말년에 루게릭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손수 정원을 가꾸었고 유골도 그곳에 뿌려졌다고 한다. 갤러리는 여느 갤러리와 다르게 천장이 낮고 바닥이 마루였다. 그 덕분에 방안 마냥 포근했다. 드문드문 걸려있는 사진에서는 회..

바람을 기다리는 거미 / 공순해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 (늙은 거미/ 박제영) ​ 화자(話者)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등을 툭툭 치며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손은 힘이 들어..

발을 잊은 당신에게 / 김만년

1. 이날까지 당신만 바라보고 살아왔어요. 당신의 육중한 무게에 눌려 숨죽이며 살아왔죠. 십 문반, 당신의 완고한 성채에 갇혀 퀴퀴한 생각만 키워왔어요. 별이 뜨는지 바람이 부는지 문밖의 세월은 몰라요. 젖은 길, 가시밭길, 발바닥 부르트도록 앞만 보고 걸어왔어요. 당신이 휘파람을 불며 들판을 지날 때나 파장 술에 업혀 뒷골목을 휘청거릴 때도 언제나 내 자리는 당신의 바닥이었죠. 젖은 바닥 노천탁자 밑에 쭈그리고 앉아 당신의 생각 없는 발장단에 비위 맞추며 늦은 귀가시간 기다려 왔어요. 긴 세월 당신의 보폭에 순응하며 살아왔죠. 그런데 오늘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드네요. 오늘밤에도 당신 손은 애지중지 살구비누로 씻어주었죠. 발을 발로 씻는 당신의 습관은 세월이 가도 고쳐지질 않네요. 취중이었다고요? 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