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세수 /정승윤

테오리아2 2022. 9. 2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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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엔 거지가 흔했다. 그때는 거지들이 탁발승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다. 곡식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먹던 밥을 퍼주었다. 어머니가 거절하는 경우는 대개 거지가 아침 식전에 온다거나, 멀쩡한 사람이 구걸을 다니는 경우였다. 거절하면 말없이 조용히 가는 사람도 있었고 문간에 붙어 서서 떼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전후에 생긴 고아 거지들도 많았다. 그 애들은 대개 깡통을 들고 다녔다. 길거리에, 다리 밑에, 사직공원 정자에 거지들이 득실득실했다. 거지를 보지 않고 지나는 날이 드물 정도였다. 양지 녘에 거지 남매가 쪼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던 기억도 있다. 몇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서 얻은 밀가루인지, 조그맣게 반죽을 하여 떡 모양도 빚고 국수 모양도 빚고 있었다. 그 모양이 제법 그럴싸해서 사람들은 연신 감탄을 하며 웃고 있었다. 

하루는 식구들이 다 집에 없고 나 혼자 마루에서 뒹굴고 있는데 웬 거지 하나가 불쑥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 거지가 구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우물가로 가는 것이 아닌가. 나보다 서너 살쯤 더 들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세숫대야에 펌프 물을 받더니 태연히 세수를 하였다. 거지라면 당연히 굽실거리며 구걸을 해야 마땅할 텐데, 그의 하는 짓이 어린 눈에도 너무 터무니없어 보였다. 거지가 낯을 씻는다는 것도 어쭙잖은 일이거니와, 주인 허락도 없이 대야를 사용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른 거지라면 무서웠겠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는 하지만 여자애 아닌가. 나는 용기를 내서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러자 그 여자 거지 애는 나를 빤하게 쳐다보더니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아주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팔과 목까지 씻었다. 나는 거지를 줄곧 노려보았지만 그 거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저히 구걸하는 거지의 태도라고 볼 수 없는 도도한 태도였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혹시 어머니가 돌아오셔서 거지가 하는 짓을 보고만 있었다고 나무랄까 봐, 가끔 멍청한 개처럼 소리를 한 번씩 내지르곤 했었다. 도대체 저 애는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것일까. 가만히 있으면 얕보고 더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두려운 생각마저 들어 목소리마저 떨려 나왔다. 저게 누나라면 한 대 쥐어박을 텐데. 그러나 그 애는 내 누나처럼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 애는 그런 식으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주면서 나를 실컷 괴롭히더니 올 때처럼 말 한마디 없이 세수만 끝내고 나가버렸다. 뭘까? 왜 하필 우리 집에 와서 세수를 했을까? 나는 수수께끼에 휩싸여 오후를 보냈다.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그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틀림없이 ‘이 방안 퉁수 같은 놈, 명색이 사내자식이 그걸 못하게 해야지 보고만 있었냐’ 하고 핀잔을 줄까 봐 주저가 되었다. 밖에서는 불지 못하고 캄캄한 골방에서만 퉁소를 부는 ‘방안 퉁수’가 되더라도 나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머니는 뜻밖에도 나를 나무라는 대신 뭔가가 짐작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그 거지 애가 이만저만한 여자애가 아니더냐’고 물으시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아침에 나가시다가 그 거지를 만났는데 제법 처녀꼴이 나는 애가 거지라도 너무 더럽게 하고 다녀서, 어디 개울에라도 가서 좀 씻고 다니지 그러냐고 충고 삼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세상에 기어이 우리 집을 알아내 가지고 그 앙갚음을 하였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나는 비로소 그 여자애의 행동들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때 나는 처음으로 ‘여자의 자존심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라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은 셈이다. 나는 지금도 여자들이 두렵다. 울고 나서 세수하는 여자들이 두렵다. 울고 나서 화장을 고치는 여자들은 더욱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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