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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중봉조헌문학상 우수상/지부상소 持斧上疏 / 손경호

오래전, 공직에 있을 때다. 차관이 국장을 부르더니 장관의 경고를 전했다. ‘회의 때 장관 뜻에 반反하는 의견을 말하지 말라.’였다. 귀를 의심하고 넋을 잃은 국장은 장관과 다른 의견을 말했던 두어 번의 일을 더 듬어낼 수 있었다. 대면의 일자(一) 충고와 삼자를 건너는 갈지자(之) 힐난詰難은 모양새만 봐도 네 배의 강 도强度로 세게 꽂힌다. “중지衆智를 모으자는 회의 아니던가요?” 목에 걸린 가시를 내뱉듯, 국장의 대꾸는 받은 힐난의 충격보다 더 불손했다. 처신을 살피게 해 주려다 머쓱해진 상관의 면전에 뱉어낸 부하의 다음 한 마디에는 더욱 가시가 돋아있었다. “목에 칼이 와도 해야 할 말은 해야지요!” 피의 왕 연산은 신하들에 게 신언패愼言牌를 채워 입을 봉쇄하고, 유일하게 진언進言했던 내관 김처선金..

호박꽃 / 변재영

신념의 꽃이 있다. 옥토와 박토를 고집하지 않는다. 논두렁 밭두렁이면 어떠랴. 햇빛 한 줄기 드는 곳이면 쇄석 자갈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뼘의 빈 땅만 허락하면 가나안의 복지인 양 바득바득 덩굴손을 뻗어 꽃을 피운다. 인심 넉넉한 외할머니를 닮은 꽃, 담장 위에 노란 별로 뜨는 꽃이 호박꽃이다. 소낙비 한 줄금 긋고 간 아침, 텃밭을 뒤지던 뒤영벌 한 마리가 나를 시간 저편으로 끌고 간다. 유년시절, 초가집 일색인 동네에 유일한 기와집이 우리 집이다. 땡감나무에 몸을 숨긴 쓰르라미가 목청을 돋우면 담장 위에는 분칠한 듯 노랗게 핀 호박꽃이 맑고 투명한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내겐 어머니가 둘이다. 살을 주신 어머니는 내가 일곱 살일 때 병마로 하늘의 별이 되셨고, 지금은 키워주신 새엄마와 다..

작살 고래 / 최경숙

단번에 전광석화처럼 내 눈에 꽂혔다. 고래가 척추에 작살이 박힌 채 온몸을 펄펄 요동치고 있다. 임신한 처와 자식을 떠나 화석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모습 같다. 암벽 속에서 필사적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고래의 몸짓이 검푸른 파도를 밀어낼 것 같은 생동감에 온 몸이 떨린다. 무슨 이유일까. 바다 속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걸까. 고래 등뼈에 대형 작살이 번개 자물쇠처럼 처. 절. 히 박힌 것을 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선사시대의 아비규환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래 떼들이 천길 바닷속에서 이동하는 광경이 내 눈 속에 풍덩 빠져 들어온다. 아침나절 날씨가 점심때까지 내숭을 부렸다. 눈치를 못 챈 나는 별렀던 반구대 암각화를 보려고 출발했다. 얼마 가지 못해 굵어지는 빗방울에 차창이 얼룩무늬를 지었건만 고래를 만나..

엄마의 반어법 / 유병숙

병원 아침 식사 시간은 7시였다. 어머니 식사를 수발하러 병실에 들어섰다. 전날만 해도 비위관에 산소 호흡기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어머니가 맨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필시 밤새 또 줄을 잡아 빼었으리라. 비위관을 삽입하려면 매번 사투를 벌여야 했다. 정작 사고를 친 어머니의 표정은 천연덕스러웠다. 십여 일 전 숨이 넘어갈 듯 가쁘게 몰아쉬던 어머니는 119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요로감염과 결석, 그로 인한 패혈증으로 죽을 고비를 한 차례 넘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장으로 가는 혈관들이 막혀있어 스텐트 시술을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난제는 삼킴장애였다. 연하검사를 하니 물이나 음식이 기도와 귀로 넘어가고 있었다. 흡인성 폐렴이 염려되어 경구용 음식은 금해졌고, 앞..

잎새달, 연두가 온다 / 장미숙

초록은 배경을 둔 색깔이지만 연두는 배경이 되는 색깔이다. 초록의 바탕색을 이루는 연두는 봄의 전령사이고 모든 색의 시작이다. 봄이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 출발선에 선 연두가 머리띠를 질끈 묶고 선수로 나선다. 지대가 낮은 들판으로부터 길을 건너고 마을을 지나 계곡을 가로질러 높고 낮은 산으로 연두는 달려간다. ​ 논둑이나 밭둑에 걸터앉고 저수지 둑에도 멈춰서며 돌담 옆 감나무 가지에서 까불기도 한다. 보리밭에서 한눈을 팔다가 개울물 소리에 발맞춰 종종거릴 때도 있다. 연두가 머무는 곳은 생명의 성지가 된다. 꿈틀꿈틀 피어오르는 흙의 온기에 스며 연두는 쑥이 되고 냉이가 되고 달래가 된다. ​ 바람의 옷자락 사이에 숨은 연두는 숲속 나무를 깨운다. 가지마다 피어난 잎눈 속에는 연두의 숨소리가 가득하다. 한..

막사발의 철학 / 복진세 - 2022 매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한국의 그릇에는 도자기와 막사발이 있다. 가만히 보면 생김새도 다르고 쓰임도 달라서 재미있다. 사람도 도자기 같은 사람이 있고 막사발 같은 사람이 있다. 도자기는 관요에서 이름난 도공에 의하여 질흙으로 빚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다. 도자기는 관상용 또는 화병이나 찻잔, 식기 등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대부분은 만들어질 때부터 용도가 정하여진다. 격식 있는 상을 차릴 때는 밥그릇 국그릇 탕기 찜기 접시며 주병 등과 같이 용도대로 사용해야 한다. 국그릇에 밥을 담을 수는 없다. 그릇 하나에 하나의 용도만이 정하여졌다. 도자기는 활용 면에서 보면 매우 편협한 그릇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깨끗이 닦아서 장식장 등에 전시되어 관상용으로 사용된다. 행여 다칠세라 다루기에도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우리 집 대청마..

제15회 사계 김장생문학상 당선작/창(窓) / 오미향

엄마가 돌아가신 후 물건 정리를 했다. 부엌 곳곳에 소주병이 숨겨져 있었다. 싱크대 아랫단에서 양주병 과 포도주가 진열된 찬장 구석진 곳에서, 간장병과 식용유 사이에서도 초록색 병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기 제사가 끝나고 시누이와 시고모님의 거침없는 입담이 지나간 후에 돌아서서 몰래 찾아들었을 눈물 한 방 울 소주 한 모금. 서울에 있는 여대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장녀라 지방교대를 가야했던 큰 언니가 단신투쟁 을 할 때에도 모른 척 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큰 오빠를 해병대에 보내고 돌아섰을 때에도, 지방고위공무 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아버지가 당뇨합병증으로 거동을 못하셨을 때에도 남몰래 찾아 들었을 소주 한 병.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도록 답답하고 체증이 내려가지 않았을 때 혼자 식구들의 눈을 피해 들이켰을..

누가 살았을까 / 한시영

자박자박 흙길을 걷는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는 아스팔트와 달리 발에 닿는 느낌부터가 부드럽다. 편리성에 익숙한 도시의 포장도로가 아닌 시골길이 비구름에 쌓여 운치를 더한다. 경계를 지으면서도 휘어져 도는 유유한 토석담이 고목을 끼고 마을을 잇는다. 산청 단성면 남사 예담촌. 가세를 짐작게 하는 고택의 기와 끝에 봄비가 떨어진다. 비에 젖어 더욱 검어진 기와색이 고색창연하다. 세력가의 집 앞에 심어졌다는 부부회화나무가 서로에게 기대어 바람의 성미를 아는 옛사람들의 지혜라는 듯 정갈한 대문 입구를 지키고 있다. 달빛 스며들었을 툇마루 빛바랜 창호가 유구하게 살아온 사람 이야기를 무언으로 전한다. 집은 한자로 집우宇 집주宙라 쓰고 두 글자를 합쳐 작은 우주라 한다. 집은 단순한 비바람을 막아내고 의식주를 영위..

쪽항아리/ 김희숙(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그가 움직인다. 손짓춤에 살결 같은 무명천이 내려서고 조리질에 참깨 올라오듯 누런 진흙물이 일어난다. 토닥거리며 매만지고 빠른 장단으로 휘몰아치니 항아리 안에 울돌목 회오리바람이 인다. 강바닥이 뒤집힌 듯한 너울에 정신이 혼미하다. 토해낸 물거품이 모여 수런거린다. 그가 젖은 천을 치켜들고 훑어 내리자 하늘 한 조각 떼어온 양 푸른 쪽물이 주르륵 쏟아진다. 흙을 빚어 태어났다. 잘록한 목선 타고 흘러내린 허리는 어린아이 두어 명을 거뜬히 품을 정도로 넉넉하고 진한 흑갈색 겉옷엔 빗금 몇 개 그어 멋을 부렸다. 풍만한 맵시는 미스 항아리 대회라도 나섰더라면 등위 안에 당당히 들었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녹여버릴 듯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이 타들어가는 뜨거움을 견딜 때는 어느 종갓집 볕 드는 마당가..

흔들리며 산다 / 남태희

기차에 몸을 싣는다. 아침을 깨우는 희붐한 안개가 드리워진 창에 머리를 기댄다. 철커덩 출발을 알리는 진동에 연이어 일정한 흔들림이 불안정한 심사를 위로해 준다. 눈을 감아 본다. 철컹철컹 일정한 침목의 간격 덕분인지 연속한 기계의 작동 덕분인지 치솟았던 마음자락이 수굿해진다. 한쪽으로 어깨가 살짝 기울어진다. 곡선 구간인가 보다. 해안선이 보이겠지 싶어 실눈을 하고 밖을 보니 하얗게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 출렁이며 깨어지는 것이 어디 파도뿐이겠냐며 굽어진 해송 한 그루가 참빗 햇살에 몸을 맡긴다. 다시 눈을 감는다. 햇살의 유희가 시작된다. 촘촘한 빛살, 느슨한 빛살,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빛살, 언덕에 막힌 빛살, 커튼 자락에 걸렸다 들어온 빛살, 움직임에 따라 밝음의 명도와 채도가 달라진다. 보랏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