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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뫼비우스의 띠-배찬희

테오리아2 2015. 12. 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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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뫼비우스띠
                                   배찬희



내가 안(內)이라 했을 때
그는 늘 밖이라 했다.


내가 바람 건너간 빈 가지 위로
사랑을 날려 보냈을 때
그는 주머니 속 가득 한기 뿐인
이별 태엽을 감고 있었다.


내가 청계천 헌 책방에서
찾아낸, 향내나는 한 권 책으로
진리를 이야기했을 때, 그는
― 빈 들판으로 달려가던
달려가 쓰러지던
쓰러져 짓밟힌 ―
가시나무새가 토해내는 빛나는
노래 한 자락 들려 주었다.


내가 늘 푸른 하늘 시려, 눈물 지을 때
그는 날마다 붉어지는 땅
아파 미소 지었다.


내가, 하늘을 새한테 빼앗긴 우린
내일은 어느 하늘을 비행할 것인가 물어갔을 때
그는 땅마저 사람에게 빼앗긴 우린
오늘은 어느 땅으로 떠돌 것인가, 일러 주었다.
「떠돌다 숲 속 푸르름이 되어버린 우리」라고
― 그림자가 없어요 ―
밤새 노래하던 푸성귀 같은 벽
벽들이
무너진다.
나의 덧없는 기우가
그의 푸른 미소가


무너져 내려
눈물 마른 자, 깊은 한숨으로 쏟아지고
추운 입김들의 따스한 성벽으로 다시 쌓일 때
보․인․다․
깃대 없이도
펄럭이는 슬픔의 깃발.


사랑과 진리와 아픔까지도
그는 늘 밖이라 하지만 나는
항상 안(內)을 생각한다.
                                                                 * 198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1984년이라,  그 즈음 나는 영장을 받았고, 입영여행을 가자던 친구들과  겨울바다를 보고싶어 조치원에서 기차를 타고 그 먼 인천 송도 어디의 겨우 참호 하나가 전부인 쬐그만 돌섬, 그 질척이는 간척지 부려져 있던. 그때가 이월 중순. 그리고 군대생활.  

  생은 미친 듯 앞으로나 갈 뿐이지만, 그런 까닭에 우린 뒤를 쳐다보는 것을 잠들무렵에나 겨우 하지만, 그렇기에 시 한 편이 부려놓는 그 시절의 추억들은 시와 뭉쳐져 언덕을 굴러내리는 눈덩이로 들이닥치곤 한다. 내게도 저런, 그러니까 청계천 헌책방 골목을 더듬어 누군가 밑줄을 그은 문학서적을 반값에 구하던 경험이 있다. 물론 지금처럼 인기없기는 매 한가지여서 옆엔 희미한 그림자나 겨우 따라다녔지만. 

  <신춘문예당선시집>에서 발견한 이 시는 당시에는 드물게 감각적이며 사유에 몸을 주는 독특한 시적 전략을 구사한다. 그즈음의 당선작들이 허구의 포즈와 거창한 관념의 형상화가 주류를 이루거나, 더러는 실생활의 잔잔함들이 적당량의 패배감과 상실감, 거기에 수미상관으로 90원어치의 희망이 맞물리던 때여서, 거진 10년은 지난 뒤, 까막눈이던 나는 이 시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고 끌려들었던 적이 있다.

  앞뒤로 뒤틀려 이어진 도무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향해 이 시는 나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 만날 수 없는 단면에 속한 냠녀의 영원한 속성을 노래하려는 것일까. 왜 우리는 바라보려는 지점이 다른지, 같은 곳을 보는 중의 생각이 왜 이다지도 상반되는지를 알면, 이미 다 살아버린 때 겠지. 그때쯤 그것을 알면 무얼하나. 그냥 그러므로 조금씩 움츠리고 서로를 경원하면서 또 더러는 그리워하면서, 온갖 양가적인 가치들은 죄다 맞세워 놓고, 인류는 남녀로 나뉜 채 일찍이 끝난 적이 없는 전쟁을 치루는 중일 게다.

 그나저나 저이는 어디서 무얼 한담. 신춘당선의 이력을 무엇에 쓰고 있는지. 내가 머무는 면의 저쪽 뒤틀린 데를 사시는지... 알 길이 없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청개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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