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 족경
유홍준
고향집 장독대에
이제는 다 채울 일 사라져버린 서말가웃 장독 하나가 있다
흘러내린 바지춤을 스윽 끌어올리듯 무심코 난초 잎을 그려넣은
장독 앞에서 팔만 개의 족적을 본다
반죽을 다지고 또 다졌을 팔만 개의
발자국소리를 듣는다
누가 한 덩어리 흙 위에
저만한 발자국을 남겨
제 발자국을 똘똘 뭉쳐 독을 짓는단 말인가
천도가 넘는 가마 속에서
발갛게 달아올랐을
발자국이여
뒤꿈치여
단 한번이라도
저 독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면 나는
대시인이 됐을지도 몰라
간장이 익어 나오는 걸 봐
不正이라고 못익히겠어 천벌이라고 못 익히겠어
콧물 훔치듯 난초 잎을 올려 친
팔만대장, 족경이여
2011.3.30. <한국일보>에서
그는 친구면 친구지 뭔 "형"이냐 하고, 시로나 나이로나 사람으로나 형이 마땅하지 싶어 난 그렇게 부르지만, 그리 부르면 대답은 하되 하대하지는 않는 양반. 가끔 그의 시가 좀 더 손아귀를 그러쥐었으면 싶을 때가 땀구멍의 십분지 1만큼 있지만, 그가 있어 어지러운 현대시와 독자의 완충지도 있지 않을까 싶어 또 끄덕이게 된다. 흔치 않은 시적 미덕을 그는 지닌 것이다.
시가 뭐 별거냐는 듯 묵은 짠지를 쪽 찢어 밥술에 걸치듯 말을 무슨 밀가루 반죽하듯 쉽게 다루어 가는 그의 경지를 볼 때면, 아직 멀었지.... 나는 아직 젖내가 풀풀하지 싶어서 절망타가도, 그는 그의 지분을 곱씹고 나는 나대로 또 씹을 것이 널렸을 터인데 싶어서 나를 향해 돌아눕게 된다.
그는 시가 시 되는 지점, 시가 시 되는 포즈, 시가 시 되게 하는 스위치 같은 것을 옷소매 속에 숨긴 사람 같으다. 누구의 작은 경험이며 삶의 편린들을 함부로 들어 넘기지 않고 걸쭉하고 찰진 문양과 맛으로 빚어내곤 한다. 그런 그를 비춰볼 때 경험이 그 사람의 작품이라는 속설은 그러니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 된다. 뱀이 먹은 이슬이 이슬로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그런데 또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가 겪고 듣기만 할까. 남들 다 자는 밤에 혼자 질그릇 하날 꺼내어 품고 자신에게서든 타인에게서든 비롯된 밀가루를 땀에 개어 반죽하고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저리 넓은 언어의 진폭을 다스려 독 하나로 뭉쳐낼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나나 당신들은 어떤 것을 반죽하는 상상이나 하고, 재기없는 자신을 탓하기나 하고, 한두 번 주물럭거리다가 내던지기나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그 조차 "단 한번이라도/ 저 독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면 나는/ 대시인이 됐을지도 몰라" 하며 '발뒤꿈치의 팔만 번의 독경'을 품은 독을 부러워 하는 것은 그가 또 사물과 인간과 세상 만물을 참으로 곡진히도 아우르다가 그냥 자신이 세상 자체만은 못한가 싶다고 넋두리 하는 좀 드센 모양새랄까. 어쨌거나 시간이나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반죽을 팔만 번 쯤 즈려밟을 발꿈치나 끈기 같은 게 없으니 나란 헛헛하게 마음이나 다치고 있겠지. 깨달음을 주시는 누구나 스승일진대, 다음에 만날 땐 쌤!쯤으로 승격 시켜버릴까나. 그러면 그 양반 중의 뭣 하나라도 배우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그룹명 > 시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Re:우리집에 와서 다 죽었다 -유홍준 (0) | 2015.12.09 |
---|---|
[스크랩] Re: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0) | 2015.12.09 |
[스크랩] 뫼비우스의 띠-배찬희 (1) | 2015.12.09 |
[스크랩] Re: 제비집- 이윤학 (0) | 2015.12.09 |
[스크랩] 저수지- 이윤학 (0) | 2015.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