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저녁 상가(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들이 구두들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식구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북천(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시집<상가에 모인 구두들 >. 실천문학사
사는 게 어디쯤에선가 목적지를 놓아버리고 '이쯤 왔으면 됐어. 한 만큼 했으니까.' 중얼거리며 퍼질러 앉아 공기놀이 하듯 노닥거리는 일, 그게 사는 것이라면, 나는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밤에 자리에 누우면 나는 자꾸 잠을 뒤로 미루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닥달 하다가 뻑뻑해진 눈알이나 굴리며 잠들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런 엄살 때문에 나는 나를 친애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고 나면 좀 너그러워져야지. 내게, 당신들께. 그러나 이러는 동안에도 오금은 저리고 무언가가 발가락을 질겅거리고 있다. 별수 없이 사람일 동안...
시는 누굴 위로하자는 몸짓이 아니다. 자기를 숨쉬는 동안, 자기를 용서하는 동안일 뿐이다. 시는 환한데 밖이 캄캄하다. 상가는 마을의 그중 환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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