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기증
조정
어머니를 해부학교실 냉동고에 두고 왔다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왔다
머지않은 곳마다
신호등은 그 눈이 선지적으로 붉었다
날이 뜨거웠다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대학 앞 버즘나무들이 투르크족처럼 푸르고 굳세었다
많은 자동차와 간판들 사이로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가로 세로 하늘로 걸쳐진 사다리
천사이거나 야곱
출렁거리는 허리춤에 매달려
어머니는 영사기 리모컨의 꺼짐 버튼을 누르는 중이었다
중풍에 무너진 오른 팔을 늘어뜨린 채
상영되던 어머니
하늘은 완전히 비었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웨딩 리본과 풍선을 펄럭이며 흰 무개차가 스쳐 지나갔다
깔깔깔
빈 관 끌리는 소리도 무사히 따라오는지 근심하며
집에 왔다
울타리에는 찔레가 지고 어린 장미들이 피었다
어머니는 벌거벗긴 채 냉동고에 있었다
젊은 날에는 순수해서 삶의 염결성을 믿기에 생 자체를 초개처럼 여기기도 하겠으나, 늙어보면 안다. 내가 없으면 지구도 이 세계도 우주도 한낱 쓸모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렇더라도 늙는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뜻은 아니다. 삶이 더러워도 사람의 자세만은 견지하는 것. 그래야 한 번뿐인 생의 가치가 지켜질 것이다.
시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루는 듯 싶지만 죽음 자체를 비껴앉은 자리를 노래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죽은 어머니의 시신을 대학교에 기증하고 돌아오는 화자의 시선을 쫓는 위의 시는 사랑하는 이의 시신을 "기증"한다는 것을 마치 감기 예방주사 맞듯 단순화하는 것으로 도리어 화자의 깔깔한 시선이 슬픔을 증폭시키는 역설을 발휘한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와 거리의 표정들, "선지적으로 붉다"는 표현이 '선지'의 붉음과 '선지자'의 붉어야 할 정신 사이에서 파르르 떨리는 것도 시인이 언어를 휘두르지 않고 중간지점에 툭 던져놓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대학'이라는 젊은 공간과 거리의 역동성과 깡통을 끌며 내닫는 웨딩카의 들뜬 분위기는 죽음(시신기증)을 정리하는 화자의 심정을 돌아앉은 자세로 되짚어보게 하는 것이다.
그 때문이다. 2연의 난해한 "사다리"도 나는 다 끄덕일 수 있겠다. 화자가 보는 생전의 어머니가 스스로 "영사기 리모컨의 꺼짐 버튼을 누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까지 다 말이다. 마지막 두 행의 대비 역시 대비인 듯 아닌 듯 처연하면서도 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런 시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면 시인이 "시신기증"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의 무게를 재어볼 수 있으려나. 시는 설명으로 온전히 이해되는 장르가 아니다. 온전한 설명이나 논리적 증명이 가능한 시를 만나려면 수학자에게 시를 요구해야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애매함 30%가 시를 알딸딸한 취기를 가진 술쯤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위 시의 행의 진행을 잘 살펴보면 시인이 꾸려가는 시의 구조도 보인다. 그런데 또 그것마저도 설명으로 이해될 성질은 못 된다. 각 연의 순차적 진행이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된다는 것, 그 간격을 구체적 뉘앙스로 이어 퉁치고 간다는 것을 눈여겨 볼 수 있다면 속을 비워서 단단한 대나무가 또 그쯤이겠거니 끄덕일 수 있다면 반쯤은 시라는 장르를 섭렵한 셈이라 하겠다. 무슨 말을 더 덧붙일까. 시는 언어에 있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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