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시 방

[스크랩] 노새와 버새 -김 언

테오리아2 2015. 12. 9.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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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새와 버새

                                           김언

 

       1

    시가 재미없으니까 딴생각이 행복하였다

    정말 그렇냐고 물어보면

    정말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내 신념은 간단하다

    내일 또 바뀌니까

    기대가 크고 허풍이 심하고

    자주 의기소침해진다

    이쪽 뺨을 내밀고

    저쪽 뺨을 내밀면

    손바닥이 아플 텐데

    어느 쪽이 더 아플까

    군화와 얼굴이 만나서

    어느 쪽이든 멍이 들 때까지

    때려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서

 

       2

    각자의 이름에 충실하였다

    각자의 피를 소개하고

    토마스는 잊을 만하면

    담배를 태웠다

    연기가 빠지지 않는 대화를

    이어갔다

    톰은 영원히

    톰이 될 만한 자세로

    이야기하였다

    되도록 간결하게

    불을 붙였다 두 눈을 모아서

    이글거리는 한담에 집중하였다

    한방에 앉아서

    우리는 모두 외국인이었지만

    어느 쪽이 더 외국인일까

    외계의 피가 섞인

 

      3

    당나귀는 조랑말의 먼

    친구였다 노새는

    노새와 혼자서 놀았다

    버새는 더 무거운 짐을 싣고

    알프스를 건넜다

 

 

  무엇이라 불리든, 무엇으로 부르든 상관없이 1인분의 생이면 안 될까. 저마다 다 된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타자가 바라보는 나는 늘 조금 모자라는 1인분의 생이다. "1인분"이라는 말에서 이미 나는 사람을 괄시하는 모양으로 이 글을 적는다. 그는 대체 몇 인분의 몫을 하려고 저렇듯 시를 밀고 갈까. 에전의 시들이 살냄새로 살아있음을 증명하려 했다면 이제 시인들은 '상상하므로 존재한다' 쯤에, 그쯤의 별에서 나고 자라고 사는 모양이다. 

   낯선 이물질들이 진흙더미에 함께 뭉쳐졌는데도 자연스럽다. "시가 재미없다"는 아마도 이미 고형된 틀에 관한 논제일 것이다. 추측 뿐이라서 슬프지만, 어쨌거나 시인은 논다. 노는 것으로 노새가 된다. 여기서 노새는 서러운 이름을 버리고 버새보다 행복하다. 재미없음을 벗어났기 때문일까.

   중요한 것은 낯선데도 자연스럽다는 것, 장난인데 몸을 얻는다는 것. 놀이인데 그조차 생이 되는 지점을 그가 발견했다는 점이다. 이러니 우린 좀 단단하고 질긴 가랭이가 필요해진다. 찢어지지 말고 내 식으로 뛸 일이다. 황새를 따라하지 말고, 황새조차 되려하지 말고 그런 새가 있다는 것조차 잊자. 그래야 나의 노새는 나와 마주서서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열여보지 않으면 새로운 방식이 생기는 법이란 없는 것. 아흐얘, 올 것 같지 않은 봄이 오는가보다. 

 

 

-지방에 머물며 숙과 식과 미정의 날들을 버무립니다. 여긴 거기서 멀고 정처없어 황홀하고 사람은 덜컥 서럽습니다. 누누이 신념도 없이 그렇습니다. 부디 전염되지 않기를.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청개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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