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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우왁, 우악 -송기영

테오리아2 2015. 12. 9.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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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왁, 우악

                                                    송기영

 

 

 

  어떤 컵으로? 자고로 커피는 좋은 컵으로 마셔야 해요. 이건 고대 한지 제조법으로

만든 컵이죠. 백 번은 행궈 쓸 수 있어요. 이건 이집트산이구요. 좀 더 고급스러운 컵

이 있는데,염소똥으로 만든 컵이에요. 우왁이라고 하죠. 똥이라고 다 같진 않아요. 시

멘트 묻은 벽지를 먹었느냐, 슬로베니아 합판을 뜯었느냐, 당신도 그렇죠? 지폐를 먹

인 똥도 있어요. 가장 질 좋은 지폐는 지하에 묻혀 있다고 해요. 때묻지 않았으니까.

폐에 그려진 얼굴은, 염소들만이 곱씹는다니까요. 맞아요. 시대는 언제나 컵으로 통

했죠. 종이가 녹기 전에 어서,  쭈욱, 이 동네 기초 질서죠. 취향이 거리를 더럽히면 안

되니까요. 아, 저거요. 당신 것과 같아요. 저질 일간지에 다르긴 달러를 듬뿍 먹인 건

, 특별히 우악이라고 하죠. 애용하면 눈이 멀지만, 중독성이 있어 죽어도 못 끊는다

나 봐요. 자, 다음 분. 어떤 컵으로?     

 

                                                     시집 < .zip >, 민음사

 

  이미지든 이야기든 시적 장치를 통해 시에 복무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고형된 인간의 무언가를 뒤흔들 수만 있다면 그건 더할 것 뺄 것도 없는 시다. 물론 전제가 있고 그 전제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시적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넓고 다양한 스팩트럼을 가지며 그런 의미에서 무르고 견고하다.

  언뜻 커피 시음용 설명서처럼 보이지만, 또 읽으면 컵 사용 설명서구나 싶지만, 이마저도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이 시에서 유통되는 상식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상식이 아니라 시인의 시선에 의해 되바라진 상식들이다. 그런데도 다 끄덕여지는 상식으로 이해되는 것은 왜일까. 못 알아듣겠으면 욕이라도 한 바가지 들어부을 텐데.

  어쨌거나 이런 시쓰기의 방식은 이미 형태를 갖춘 시의 지분에 관한 싸움이 아니다. 놀이가 삶이 되는 지점의 이야기다. 그런데도 슬프다. 시는 가볍고 통통거리는데 뒷맛이 쓰다. 이쯤이 시에서의 불랙코미디적 지점이라면,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 순간 외연은 '다르긴 달러'의 넓이로 넓어진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청개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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