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
처음에 당신은 나를 시력이라고 불렀어요 시월이 되자 나는 아침 기온이 되었고 당신의 샤프심 굵기가 되어 매일 같이 학교에 갔죠 첫눈이 오던 날, 나는 강설량이 되었고 생물 시간에는 페하나 소금물 농도로 둔갑했어요 다이어트를 시작한 당신, 나를 저칼로리라고 부르다가 하루치 감량 체중으로 설정했지요 어느 날부턴가 당신은 나를 당신의 남자 친구로 임명했고 커플링 무게가 된 나는 당신의 약지에 의지하며 겨울을 났죠 당신의 고삼 시절은 내가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했어요 표준편차가 되었다 sinA의 값이 되었다 정신없었거든요 졸업 시즌엔 전광판의 대학 경쟁률이 되어 밤새 껌뻑거렸어요 대학에 들어가 플라톤을 배운 당신, 나를 덜 존재한다고 업신여겼죠 나는 당신의 구 버전 소프트웨어가 되어 책상 서랍에 처박혔어요 그러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당신은 나를 본격적으로 잊어버렸죠 내가 없이도 세상을 부를 수 있게 된 거예요 현재완료였던 나는 일순 대과거로 까마득해졌죠 이제 렌즈를 낀 당신은 시월의 찬바람을 맞고도 나를 떠올리지 못해요 만년필을 쓰는 당신, 샤프심이 끊어질까 위태로웠던 순간들을 기억이나 할까요 눈이 내리면 당신은 눈만 봐요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는 안중에도 없고요 남자 친구와 이별한 날, 당신은 약지에서 나를 빼내 쓰레기통에 휙 던져 버렸죠 그리고 반쪽을 잃은 마음고생으로 살이 빠지기 시작했어요 어느날 새벽, 비로소 나는 당신의 몸뚱이에서 완전히 분해되었죠 가뿐해진 거, 당신도 느끼죠? 이제 나는 당신이 없는 곳으로 떠나려고요 홀로 더 존재하기 위해서 말예요
<호텔 타셀의 돼지들> 민음사
시가 단 한 가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시란 없다. 그러나 새로움은 최소한 과거를 깔고앉은 뒤에라야 생겨난다. 언젠가 아버지는 사라지고 나는 아버지가 된다. 분명 나는 아버지보다 새롭다. 나의 말은 아버지 세대의 말이지만 확실히 그것보다는 삐딱하고 이국적이며 낯설다. 그리고 나도 사라지게 된다. 아들놈은 말할 것이다. 고리타분했던 꼰대에 관해서. 그러면서 더러는 울분을 토하고, 그러는 가운데 눈물을 글썽이기도 할 것이다. 이 되먹지 않은 논리는 인류가 오늘에 이르는 원동력이었으며 그 전부였을 것이다.
오은은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한 젊은 시인이다. 그의 첫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은 장난스런 말의 성찬으로 가득하다. 좀 딱딱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시는 시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시로 보인다. 지극히도 시다. 그는 말이 가진 펀(fun)을 끝 모를 데까지 밀어붙인다. 이 끝없는 밀기는 단순한 밀기를 넘어 말의 장난을 시로 바꾸는 힘이 된다. 왜 아니겠는가. 궁극에 이르면 모든게 하나의 지붕을 갖는 법 아니던가. 위 시는 그런 궁극의 밀어붙이기에서 조금 망설인, 그러니까 비교적 유순한 편에 속한다.
운이 좋아서 나는 그의 두 권의 시집을 자필싸인으로 받아 들고 형이란 소리를 듣지만. 그를, 그의 시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어정쩡함을 탄식하며 두려움이 많은 나의 더듬이를 탓이나 한다. 그러게 말로나 궁극을 외칠 뿐이지, 어디 극단이라는 끝 간 델 가보기라도 했던가. 그쯤에서라야 철저한 자기식(개성)이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 우린 '감동'이라는 시적 아우라를 너무 비좁고 궁색하게 인정한다. 서정에서 서정까지? 자신의 땅이 필요하다면 끝까지 밀어라! 중세가 지났으니 지구의 끝엔 낭떠러지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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