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가 내립니다. 가을이구요. 이런 즈음 사람들은 대개 무거워지기 마련입니다. 가을은 사귈 친구도 식량도 두루 풍성해서 아름답다고 누군가는 말했습니다만, 가을은 살아있는 것들을 자책하게 하는 묘한 힘을 가졌습니다. 대부분의 식물들이 열매를 맺는 철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때쯤이면 지난 봄,여름에 어떤 열매를 가지려 노력했을까를 되묻곤 합니다. 자책은 그런 데서 옵니다. 나와 타자를 비교할 때, 나와 외부를 견주게 될 때 보잘것 없는 내가 보이기 마련입니다.
2.
즐겨 산을 헤매곤 합니다. 그럴 때의 나는 나뿐입니다. 더러 산나물을 채취하기도 합니다. 산나물들은 대개가 군생을 이루며 모여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일대의 토양이며 일조량, 습기까지가 유사하므로 군락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공도 그런 군락을 이룬 곳이지요. 문학에 대한 열망은 있는데 그 열망을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이들, 혹은 구체화를 위해 이곳을 찾으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런저런 창작강의가 많지만 일정한 시간과 그에 합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투자가 선행되니 쉽게 손을 내밀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곳에 모여듭니다. 정보가 있고 동행자들이 함께하니 여기에선 어떻게든 움직일 방법들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유사한 경험들을 공유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 해도 그 가능함 역시 그리 만만한 것들은 아닐 겁니다. 이제까지 사회에서 얻어낸 생의 이력들이 문학 앞에서는 그닥 효용가치를 갖지 못하니까요. 무작정 쓰고 보지만 그만큼의 자괴감도 생기고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의심 하게도 됩니다. 사회적 가치 a와 문학적 가치 b를 맞바꾸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문학이 아니면 식음을 전폐하겠다" 쯤의 투쟁적 사고를 경계하는 편입니다.
시든 타 장르이든 삶을 토대로 합니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죠. 공존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당연히 슬기로와야 합니다. 물론 이때의 삶이 건강한 삶 자체를 전제하진 않습니다. 잘 알려진 예술가들의 독특한 삶이 말하듯 창작자들은 다분히 아프고 독특한 일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화된 삶의 양태에서 약간은 어긋나 있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삶 또한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나머지 많은 창작자들은 정상적이며 또 욕망의 덩어리로써의 삶, 범부범부의 삶을 견디고 그것들에서 문학의 질료들을 건져 올립니다. 그러니 그들의 문학이란 몇 몇을 빼고는 일종의 공통적 유사성을 가집니다. 어째든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일을 부지런히 하면서 휴식의 한 방편으로, 더러는 여가선용으로, 자기계발의 장으로. 드물기는 하지만 빵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주가 되리란 것은 분명합니다.
어쨌거나 문학이 아픈 곳에서 온다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즐겁고 기쁘면 뛰쳐나가 노래하고 춤추겠지요. 슬프면 울고, 울다 지치면 자신의 내면으로 밖에서 얻은 상처를 끌고 들게 마련입니다. 이런 생의 불편들, 상처들이 대부분은 문학의 질료가 됩니다. 더러 기쁨이 없기야 하겠습니까만 극히 소수라 할 수 있습니다.
3.
삶과 맞바꾸는 문학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문학과 맞바꿀 삶의 부분은 있습니다. 정신이죠. 정신이라니까 무슨 고매하고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정신이거니 하시겠으나, 이제껏 문학이 삶에서 온다고 말씀드렸으니 그것을 끌고 들어와서 '가공해내는 일'의 다름 아닙니다. 그러니 쓴다는 행위는 일(노동)인 동시에 즐기는 것(정신)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이름을 우리는 문학이라 칭합니다. 쓴다는 행위는 어쨌거나 상처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이 체험이든 타자를 통한 추체험이든 쓴다는 것에는 오롯이 자신의 정신을 녹여 넣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어법과 생각의 체계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이 글 속에 얼비치며 녹아듭니다. 녹아든다는 표현은 사실 몹시 순수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쓰기의 기술이 손과 정신의 합일을 통해 어느정도 몰려 나왔을 때 작자는 좀더 색다른 것을 기대하려는 입장을 갖습니다. 지극히도 당연스럽게 이런 입장들을 정리하면 개성, 즉 '자기 고유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자가 자신의 고유함을 갖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장단점은 생 전반을 되돌아보아도 분명합니다. 내 얼굴, 내 삶의 방식, 나만의 성질, 나만의 지문, 나만의 울타리.... 이런 것들이 한 개인의 전체를 특징화하고 타자에게 각인되겠죠. 달리 말하면 개성은 만 명 중에서 오직 자신일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독자성을 갖는 것을 이르는 말일 겁니다. 독자성은 달리보면 한 개인의 존재가치가 됩니다.
4.
그런데 개성은 또 별 것이 아닙니다. 이미 누구나 자신의 개성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삶의 과정을 빌어보면 그것은 자연파생적이죠. 일생의 어느 한 순간도 나 아닌 채로 살아온 내가 있었던가요. 나란 부지불식간의 소산인데, 다시보면 나란 끊임없는 나에게로의 몰입이며 추인인데 거기에 또 문학은 개성을 요구하는 거죠. 그러나 이때의 개성은 삶의 개성이 아니고 삶에서 얻은 체험들을 효과적으로 글로 쓰고 그 속살을 드러내는 새로운 글쓰기의 개성이어야 합니다. 문학에서 중요시하는 개성은 작은 표현들이 모여 이루어지기도 하고 문장에 나타나는 일종의 버릇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작가 고유의 사물-세상을 보는 관점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작가가 생에서 얻은 트라우마나 패배감 등에서 생겨나기도 합니다. 좋게 말해 개성이지 달리 말하면 불화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생 전반의 입장에서 그런 개성을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독자한테 자기의 생을 까발린다는 느낌 때문에 저어하게 되고, 둥글어지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러는 자기가 쌓은 지식이 시를 방해할 때도 있겠죠. 그것이 무엇이든 객관화를 통해서 넘어가고 타자화를 통해 자기만의 생이 자기의 것만은 아님을 끄덕일 때 작가는 아마 개성의 일보 전진을 이루어낼 겁니다. 한 작가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인지될 때 개성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요? 전 인식과 개성을 각각 반씩으로 보고있습니다.
5.
시의 문장을 표현으로 채우려는 시도들이 많습니다. 표현, 중요하긴 하죠. 그러나 엄밀이 따지면 개성과 인식이 포함되지 않은 표현은 별반 효력이 없습니다. 각 작품들이 하나의 구체적 현상을 향하여 유기적 군집을 이루고 이것들이 개별적이면서도 생자적일 때 그 작가는 위대한 작가가 됩니다. 말이 쉽지 힘든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난 몰라, 내던지시면 안됩니다. 구획하고 구축하려 애쓰고 효과와 그 성과를 유추해보는 습관을 가질 때 그 노력의 일부라도 유기성을 가지며 하나의 관점을 만들어낼 겁니다.
보통 대부분의 시 문장은 동사형을 추구합니다. '아름다웠다'보다는 '내달렸다'를 추구합니다. 멈춘 상태보다는 동적인 상태를 추구하고 물, 불 등의 명사보다는 한 인물의 생이 고스란히 배여나는 인물명사가 더욱 힘이 셉니다. 문장은 크게 명사와 동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부사는 동사나 형용사를 보조하지만 직접적으로 문장 자체에 복무하지는 않습니다. 물동(사물의 움직임을 부여하는 일)은 시를 활달하게 하고 생동감있는 이미지를 제공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형용이 눈부시다해도 동사를 넘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은 원론적일 뿐입니다. 동사와 명사로만 된 시는 건조하기 이를데 없을 테니까요. 결국 완벽한 문장은 자신의 속에만 있는 거겠지요. 왜 그럴까요? 자신의 문장구성의 버릇이 작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일례로 전 부사를 지나치게 많이쓰는 버릇이 있습니다. 알지만 잘 고쳐지지 않죠. 마지막 퇴고시엔 부사 몇 개를 으레 빼는 것으로 저를 경계할 뿐이죠.
그런데 문장을 이루는 단위요소들의 조합에서도 개성은 생깁니다. 어떤 작가는 명사와 동사의 사용이 다른사람과 비교해서 현저히 다릅니다. 학습된 결과에 의해서도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버릇이 반영된 결과죠. 따라서 낯선 문장은 역설적으로 자기 고유의 버릇을 극대화하는 것인지로 모르겠습니다. 다만 기존의 문장구성의 법칙 내에서 그리할 것!
6.
말이 길어졌습니다. 알기 쉬운 개성을 방법론적으로 펼쳐낸 이로 프랑시스 퐁쥬가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이 민음사에서 간행되어 있지요. 우선 그가 보는 세계, 대상은 극사실적인 세계입니다. 사물의 찰라를 관찰하고 그것을 세밀묘사(극사실주의, 하이퍼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더군요)를 통해 시화하죠.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를 관찰해서 한 편의 시로 끌어올립니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물동도 이미지도 생감도 있습니다. 그의 문장은 새롭지는 않은데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다른 셈이죠. 그의 미시적 관점은 분명 개성있습니다.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존재하니까요. 그것도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패턴 속에서 거듭 시도됩니다. 이때 그 특유의 존재감과 개성이 생기죠. 사람들은 끄덕이게 됩니다. 저이는 저런 특이점을 통해 세계를 관찰하고 인식하는구나! 그의 개성으로 추인된 것이죠. 누구도 하지 않았으니까 고유한 것이고 설사 누군가 한 것이라해도 누군가 한 번 할 것을 그는 언제나 늘 그 방식을 유지하므로 그의 고유한 방식이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일정한 방법적 전략을 통해 거듭하게 되면 작가의 세상에 대한 시적 인식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개성이기도 하고 작가관이기도 하죠. 또 다른 시인으로 송승환의 <나사(문학동네)>라는 시집이 있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근대를 이끈 사물들입니다. 문명의 이기를 이룬 기계들, 오늘의 현대를 끌어낸 부속들, 그런 것들을 통해 그는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죠. 그런 시점의 시 한두 편을 가진 시인이 없었을까요? 있었을 겁니다. 그의 성과가 된 것은 그의 집요함의 결과입니다. 시점은 메마르고 딱딱하지만 집요하게 일관된 세계를 파고드는 개성과 시적 인식은 개성을 드러내는 데 큰 성과를 가집니다.
거칠기는 하지만 개성은 어느 정도 정의한 것 같습니다. 제 관점임을 전제로 일관성을 가질 것, 주제나 소재가 하나의 틀 안에서 공통분모를 가질 것. 몇 가지의 시적 패턴으로 시의 외형에서의 구조적 다양성을 구현할 것. 등이 제가 생각하는 개성의 전제조건입니다.
7.
처음 말하려던 바에서 조금은 엇나간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있는 재료만으로 급조하는 떡볶이인 셈이니 아쉬운 대로 보시길 바랍니다. 논문처럼 정교하면 좋겠지만 제겐 그리 넉넉히 시간이 주어지질 않습니다. 이론과 토대를 바탕으로 하고도 싶지만 과부족이므로 그냥 평소 가진 생각선에서 주머니 뒤집듯 내어놓습니다. 차후에 처음 가고자 했던 방향이 떠오른다면 부기하기로 합니다.
쓰기의 고통은 생각하기의 고통의 크기에 반비례합니다. 또 쓴 글을 열 번 스무 번 다른 백지 위로 새로이 쓸 때, 옮겨 쓰는 곳이 아니라 원본 없이 생각에 기대어 거듭 새로이 쓸 때, 이야기는 연습의 과정을 거치며 대상의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보여주게 됩니다. 이런 연습 열 편을 통합하면 하나의 작품으로 남을 겁니다. 한 편의 시로 백지 30장을 소비하시길 권합니다. 자신의 문장버릇을 극대화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문장버릇이 타자에게도 매력적일 때까지 가꾸시길 바랍니다. 처음과 끝이 달라도 자신의 글로 끄덕이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지치지 마시고 멈추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1년에 복사지 열 질 짜리 두 박스 정도는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눈감고 떡을 썰 수 있을 때까지... 그만큼 쓰고 또 쓰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열 곱만큼 생각에 불을 지피고 냉갈도 피우시라 말씀드립니다. 그동안이 가장 행복하실 때임을 뒷날 문득 끄덕이게 되시길 기대합니다.
8.
글쓰기가 타자(독자)를 배려할 때, 글은 소극적이기 마련입니다. 타자를 의식할 때 작가는 체면과 이름과 자신이 가진 것을 걸 수 없습니다. 화장실에서 아랫도리를 드러내고도 아무렇지 않듯 자기만의 글쓰기의 화장실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주관자이어야 합니다. 타자의 시선을 배려하는 순간 타지는 그 글을 버립니다. 독자가 보고 싶은 것은 자기와 다른 작가의 시선이지 순치된 채 무색무취가 된 둥근 글이 아닙니다. 그러니 가장 자신일 때를 써야 하며 그럴 때 타자의 매혹도 커집니다. 보통 소통의 문제를 이의로 제기하는 이들이 있긴 합니다만, 시적 소통은 시로 독자를 끄덕이게 하는 것이고 매혹시키는 것이지 글 내용의 보편성을 담보하자는 건 아닙니다. 두 관점은 엄연히 다름을 고민해보시길 바랍니다.
또 날궂이를 했군요. 이곳의 모든 이들께 건필을....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내게!
-일전에 올렸던 글을 조금 수정해서 다시 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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