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54

우산-김근혜

우산 김근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할머니 몇 분이 우산을 쓰고 간다. 그 옆에 어정쩡하게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따라가는 또 한 할머니가 있다. 허리까지 굽어 잰걸음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갑자기 내린 비로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나 보다. 함께 걷는 사람들은 우산 씌워 줄 생각은 없는지 걸음만 재촉한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너는 우산도 없느냐고 한마디 던진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감정이 섞인 말투다. 노인정에 같이 있다가 나온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보기가 안쓰러워서 빨리 할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우산을 씌워드릴까 하다가 마음을 더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우산도 없느냐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질 않는다. 흘려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말이..

근* 글 2018.04.04

나는 염산이었을까-김근혜

나는 염산이었을까 김근혜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느 작가의 발표 글이 자신의 글과 비슷하다고 했다. 부랴부랴 지인의 글과 비교하며 읽어 보았다. 어느 부분에선가 읽었던 대목이 스쳤다. 지인은 그 작가와 만난 자리에서 얘기를 나눈 것 같다. 작가의 글과 자신의 글이 비슷한 것 같다고. 다행하게도 지인은 그날 밤 작가와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지인의 진심 어린 사과를 작가도 순순히 받아들인 것 같다. 작가를 미워했던 마음이 눈 녹듯 가라앉고 좋아지기 시작했다며 미안해했다. 지인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면 관계가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일이란 벌리기는 쉬워도 수습하기는 어려운 일 아닌가. 자신의 잘못된 점을 바로 인정할 줄 아는 지인이 아름답게 보였다. 수업 갈 때면 ..

근* 글 2018.04.04

줄-김근혜

줄 김근혜 햇살 머금은 강물 위로 하얀 나비 떼가 나폴나폴거린다. 소슬한 바람을 타고 뱃사공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맞춰 나룻배가 닻을 내릴 것만 같다. 강원도 황지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봉화에서 흘러드는 내성천, 문경의 금천 물줄기가 만나 삼강을 이룬다. 서로 다른 세 갈래의 물길이 합류하는 간이역이 합수머리이다. 지금은 4대강 개발로 흔적은 간 곳 없고 한 줄기 물살만이 역사를 품은 채 유유하다. 사그락사그락 댓잎 소리를 들으며 선비가 걸어갔을 법한 역사의 뒤안길로 내 발자국도 따라간다. 담장 너머로 조선 시대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이 동양화처럼 펼쳐진다. 주막과 더불어 몇백 년은 됨직한 회화나무엔 솜털 구름이 다리쉼을 하고 있다. 주모가 버선발로 쫓아 나와 반길 것만 같고 가마솥에선 길손을 기다리는 국..

근* 글 2018.04.04

인연

인연 김근혜 삶은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이다.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무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함께 했지만 바람처럼 스쳐간 이들도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면 인연에 대한 생각해 보게 된다. 전화번호부의 이름을 쭉 훑어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름달처럼 떠오른다. 그중에서 동생뻘 되는 나이지만 오빠 같은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 L 씨다. L 씨는 소소한 일에까지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다. 칼럼을 쓸 때의 일이다. 신문에서 내 글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어왔다. 격려 덕분에 분발할 수 있었다. 자기 일도 바쁜데 남의 일에 정을 낼 사람이 얼마나 되랴. 조그만 일에도 살갑게 전화해서 다독이고 살아갈 힘을 준다. 그의 따스한 정 덕분에 한 해를 잘 버텼는지도 모른다. 전화번호부에서 영원히 제명한 아..

근* 글 2018.04.04

유통기한-김근혜

유통기한 김근혜 미풍 한 줄기처럼 다가온 그녀. 보랏빛 들국화였다. 무리 속에 있어도 유달리 눈에 드는 미소는 마음을 끄는 자석이었다. 시름을 담은 눈빛 속에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 선물이라며 대추 엑기스를 내밀었다. 가을부터 주겠다고 했는데 잊고 있었다며 긴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주는 것만 잊은 것이 아니고 유통기한도 깜빡했나 보다. 유통기한이 넉 달이나 지나 있었다. 차마 아름다운 마음에 미안함을 얹기 싫어서 함구했다. 살다 보면 입에 자물쇠를 채워야 하는 날도 있다. 그녀의 정이 담긴 엑기스를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 내 마음에 그녀를 담아 둔 것처럼. 오래 알고 지낸 지인도 그런 적이 있었다. 가끔 만나 차도 마시고 마음도 나누는 사이다. 한번은 벌레 먹은 복숭아..

근* 글 2018.04.04

푸른 얼·룩-김근혜

푸른 얼·룩 김근혜 블라우스에 묻은 얼룩이 표백제를 써도 지워지질 않는다. 왼쪽 가슴에 남은 흔적 같다. 그 기억을 지우려고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문질러 본다. 손목만 욱신거린다. 열 몇 살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니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이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조등으로 걸린 엄마의 빈자리가 늘 허전하던 때여서 그 자리를 대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새엄마는 나이 차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날씨처럼 변덕이 심했다. 불협화음 사이에서 늘 조마조마한 나날이었다. 벗어나고 싶어서 날이 새기가 무섭게 학교로 달려갔다. 집이 싫어서 달렸고 그 여인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서 또 달렸다. 묵은 때가 많은 빨래는 삶아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듯이 내 유년이 되돌릴 수 없는 얼룩으..

근* 글 2018.04.04

6월의 江-김근혜

6월의 江 김근혜 6월이 아름다운 이유는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영령들과 참전용사들의 뜨거운 피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파트 담 너머로 붉게 핀 장미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픔 없이 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혼탑을 보며 숙연해지는 이유도 그들의 고귀한 생명으로 지켜낸 나라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6월 25일이면 아픈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던 날이니까요. 안동에서 살던 작은아버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갔고 황해도 해주에서 살던 어머니는 남하하다가 가족과 생이별을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동족상잔의 희생자입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아픔과 어머니의 슬픔을 함께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작은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면 지금은 아흔을 바라보는 ..

근* 글 2018.04.04

용돈이 없어서-김근혜

용돈이 없어서 김근혜 어느 가난한 목사님의 사연에 카네이션 그림이 올라왔다. 화가도 기가 죽을 만큼 그림 솜씨가 대단했다. 고등학생 아들이 용돈이 없어서 어버이날 선물을 카네이션 그림으로 대신한 것이라고 했다. “용돈이 없어서…”란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다. 용돈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고 그림 꽃으로 대신한 자녀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큰아이가 어버이날 선물이라며 안개꽃과 큰 상자를 내민다. 내용물은 갱년기 여성이 먹는 음료다. 홍삼제품이니 가격도 만만찮았을 것 같다. 딸아이의 형편을 아는 나로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취업준비생이라 용돈도 없는 아이가 어떻게 마련했는지 궁금했다. 어버이날에 맞추어서 이벤트란 이벤트엔 모두 응모했다고 한다. 웬만한 사연으로는 당첨되기 어려운 것을 아는지..

근* 글 2018.04.04

가짜와 진짜/장미숙

그녀의 허리가 두루뭉술하다. 허리에 동여맨 앞치마가 중년 아저씨 바지처럼 밑으로 축 처졌다. 앞치마를 튕겨내 버린 뱃살이랑이 두둑하다. 허벅지도 터질듯하다. 자세히 보니 얼굴에도 살이 붙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변해버린 그녀의 몸이 오늘따라 유난히 둔해 보인다. 오전 열 시가 안 되었건만 그녀는 벌써 빵을 세 개째 먹어치웠다. 그리고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유난히 음식을 빨리 먹는다. 빵 한 개가 사라지는 건 불과 몇 초,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는 말이 딱 맞다. 그녀의 자제력은 오늘 통제 불능이다. 시작하면 제어가 안 된다. 결국, 포만감을 느끼고서야 멈추는 그녀의 식욕이 무섭다. 아마 생리가 곧 시작되려나 보다. 올해 마흔 살이 된 그녀, 아담한 키에 귀여운 얼굴을 가졌..

아주머니와 카스테라-장미숙

오랜만에 온 아주머니는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한발을 질질 끌다시피 가게로 들어서는 아주머니가 카스텔라 두 봉지를 들고 계산대로 왔다. 그이는 내가 묻기도 전에 한숨부터 풀어놓았다. “아유 힘들어, 다리가 아프니까 더 힘드네.” 뭔가를 갈구하는 눈빛, 아주머니의 눈에 가득 들어찬 무력함을 나는 외면하고 싶었다. 잘 웃지 않는 아주머니를 대할 때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늘 깊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과연 그 얼굴에 웃음이란 게 들어있기나 한 걸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다리는 왜 그러세요?”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욕탕에서 넘어졌는데 뼈가 금이 갔다나 뭐래나. 힘들어 죽겠어요. 아유, 힘들어.” 아주머니는 그간의 일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