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54

반곡지/김근혜수필가

반곡지에 들렀다. 비에 젖은 연둣빛 버드나무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봄의 눈짓에 화답하듯 새들의 지저귐도 정겹다. 나뭇잎은 4월을 벗으려는 듯 군데군데 초록 띠를 두르고 있다. 반곡지를 사진에 담으려는 사람들 등쌀에 도화밭은 몸살을 앓은 흔적이 역력했다. 무심한 발자국에 상처난 도화 송이를 어루만져 본다. 애써 마음을 넓혔을 도화가 기특해 보인다. 나뭇가지 몇 개 꺾어 경계를 만든 주인의 애타는 심정이 울면서 웃었던 건 아닐까. 반곡지는 유일한 쉼의 장소가 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있는 연못이지만 여기는 특별하다. 4월의 반곡지는 ‘Deep Purple의 April’이 수면 위로 흐른다. 웅장하고 경쾌하면서 클래식한 리듬이, 잠자는 영혼을 쩡쩡 깨운다. 반곡지에 와서 이 선율에 빠져보라. ..

인생항해/김근혜 수필가

인생 항해 김근혜 작은 아이는 착한 해커이다. 중학교 다닐 때, 우연히 접하게 된 삼촌의 프로그래밍 책이 인생 항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남들이 많이 가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 처녀항해의 닻을 올렸다. 대양에서 낚아 올리는 C언어는 어린 아들을 잡아당기는 미늘이었다. 암호 같은 언어와 의사소통을 하면서 세상을 배워가고 있었다. 호기심이 건넨 열정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신나는 여행이었을 것이다. 사춘기 소년이 소녀를 만났을 때의 설렘 같은 기분이었으리라. 해킹 공부는 소심한 아이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게 하는 무대였다. 자신감에 찬 날은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가끔 책과 투닥거릴 때는 절교라도 할 것 같아 옆에서 지켜보는 내내 조마조마한 적도 많았다.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는 아이가 기특했다..

벽/김근혜 수필가

장기읍성 둘레길이다. 나지막한 성벽은 여인의 허리선처럼 굽이굽이 감아 돌고 있다. 훤히 드러낸 등허리를 밟고 지인과 자분자분 걷는다.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 성벽은 각기 다른 얼굴로 정겹게 서 있다. 푸른 이끼 속에서 새싹은 움을 틔우려고 발길질한다. 발아래 엎드린 동해가 유난히 굼실거리며 금방이라도 달려올 기세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낮은 집들이 어미 날개 아래 든 병아리 같다. 포근함이 밀려드는 오후다. 지나가는 여행객의 말소리가 외딴집의 담을 넘었는가 보다. 반가움에 뛰쳐나온 할머니가 여행객의 말을 받는다. 사람 구경하기가 얼마나 귀했으면 길손들의 발목을 잡을까. 할머니의 풍기는 인상으로 봐서 젊은 날은 담벼락에 심어둔 매화만큼이나 고고했을 것 같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읍성에 얽힌 전설을 엉거주춤..

걸음 지우개/김근혜 수필가

살아온 걸음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프고, 슬프고, 모나고, 잘못된 것은 모두 지워 버리겠지요. 좋은 기억만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가슴에 아픔 몇 자락은 다 숨기고 살지 않을까요. 구태여 곱씹을 필요는 없지만, 느닷없이 튀어나와서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슬픔도 있습니다. 동창회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볼 때마다 젊어집니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피노키오도 아닌데 코 높이도 자꾸 달라집니다. 그들의 살아온 자취가 자꾸 지워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동화책에서 읽었던 신비한 샘물을 마시고 오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점점 젊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아기가 되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도 됩니다. 얼굴은 자신의 살아온 모습이 담겨 있는 그릇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변하는 것..

깊은 방/ 장미숙

‘덜컹’ 문이 닫히면 빛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전등 스위치를 찾느라 낮에도 벽을 더듬거려야 했다. 센서 등도 없고, 불빛이 흘러나오는 곳도 없었다. 불은 필요에 의해서만 밝힐 수 있었다. 여자와 아이는 차가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작은 유리창을 통해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차가 지나갔으며 자전거 바퀴가 굴러갔다. 창이 워낙 작아 단면만 보일 뿐 위의 세상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도 햇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곳이었다. 아이는 중학생, 제멋에 겨워 한창 까불 때이건만 어둠에 갇혀 버렸다. 벽에 발길질하는 아이를 여자는 바라보았다. 아이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원장님은 나만 미워해. 맨날 야단만 치고….” 아이는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집에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여자는 그런 아이가 불안했다. ..

카테고리 없음 2021.09.22

옆집 남자/장미숙

저 늙은 남자는 오늘도 나를 슬프게 한다. 등이 조금만 덜 굽었더라면,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손이 조금 덜 뭉툭했더라면, 인사할 때 고개를 너무 숙이지 않는다면, 한쪽 다리를 절지 않는다면 나는 덜 슬프겠다. 하지만 그는 등이 살짝 굽었고, 키는 보통에도 미치지 못하고, 손은 거칠고 투박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주인에게 고개를 너무 깊이 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걸음걸이가 약간 부자연스럽다.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지 때로 궁금하게 만든다.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닐 때마다 그의 어깨를 쫙 펴주고 싶고, 고개를 깊이 숙이지 않도록 뒷덜미라도 붙잡고 싶다. 오늘도 그를 보았다. 내 자전거가 그의 앞을 지나갈 때 그는 건물 사이 골목에 있었다. 매일 같은 옷에 같은 가방에 같은 신발을 신고 주머니..

어쩌자고, 이름표/김근혜

생의 서문을 읊는다. 마이크에 기름을 바른 듯 반지르르한 말이 굴러 나온다. 경매사는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마음대로 넘나들며 흥정을 붙인다. 지긋이 묵상하는 구경꾼들 등줄기에 실핏줄이 일어선다. 시간을 추리하려는 사람들의 인기척을 가만가만 듣고 있는 촛대 하나가 마음을 졸이고 있다. 한 해가 가기 전 매출이라도 올리려는 걸까. 경매사의 목소리에 고이는 힘이 만만찮다. 사람들의 잠자던 손가락이 눈을 열고 서성거린다. 물건은 전파탐지기를 매단 고래가 된다. 큰 화면으로 그를 보며 둘째손가락으로 왼쪽을 쉼 없이 클릭, 클릭하는 사람들. 마우스는 설렌다. 여체를 조각한 목각 인형에게도 극적인 장면이 나올까. 새소리마저 죽은 금요일 밤, 경매장의 열기는 뜨겁다. 잠시 쉬고 있는 나에게 DNA가 두드린다. 휴지기..

나비의 무게 / 김이랑

나비의 무게 / 김이랑 누구의 영혼일까. 날개 한 겹이 풀잎처럼 하늘거린다. 나는 붓이라는 듯 허공에 나붓나붓 휘갈기는 날갯짓, 그 초서草書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필법이라, 필시 영혼이 자유로운 족속이겠다. 중력은 무게를 가진 것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자유를 갈망하는 영혼은 그래서 살을 빼고 뼈를 깎는데 대대로 생을 바쳤으니, 그것이 날짐승이다. 하지만 날짐승이라고 부르기에는 춤사위가 현란하고 허공을 배회하는 한낱 벌레라고 보기에는 무늬가 신비로우니, 아마 다른 차원에서 온 영혼이 아닐까 싶다. 나비, 이름에 받침이 없는 그는 꽃에서 꽃으로 건너뛰는 게 일상인데, 향기로운 삶으로 보아 그만한 귀족이 세상에 없지 싶다. 나풀⦁나풀 허공에 피었다 지는 데칼코마니에 무엇이 있지 않고서야, 가볍지만, 시작..

김광석 거리에서-김근혜

▲ 김광석 거리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김광석 노래가 귓전에 울려 퍼진다. 방천시장은 추석 전인데도 한산하다. 방앗간 열린 문틈으로 파리 몇 마리가 넘나든다. 졸음을 쫓고 있는 할머니의 고개가 무거운 오후이다. 방천시장은 경대병원역 3번 출구로 나와 수성교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있다. 일본, 만주 등지에 피해 있던 전재민들은 해방이 되자 여기에 모여들어 장사를 시작했다. 먹고 사는 방편으로 터를 잡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방천시장 남쪽 10m 지점에 죄수들의 채소밭과 벽돌 굽는 공장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서 옛 모습은 찾을 길 없다. 방천시장은 1960년대부터 싸전과 떡 전으로 유명세를 탔다. 번성기에는 100여 개의 점포가 즐비했던 대구의 대표 재래시..

액자를 다시 걸며-김근혜

액자를 다시 걸며 김근혜 액자를 다시 걸었다. 삼십여 년 동안 손길이 타지 않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액자를 골방에서 찾아냈다. 마음을 닦아내듯이 닦고 또 닦았다. 액자 속엔 그녀와 소풍 갔을 때의 모습이 판화처럼 담겨 있다. 중학 시절 단짝이던 친구를 삼십여 년 만에 동창회에서 만났다. 그녀와는 내리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 키도 비슷해서 늘 옆자리거나 앞, 뒤로 앉았다. 그녀가 왈가닥이었다면 나는 얌전이였다. 우린 2인용 자전거처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교정을 거닐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는 주로 고등학교 진학 문제라든가 장래 희망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은행원이 꿈이었고 난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정 소나무 앞에서 손을 꼭 잡고 소원을 빌었다. 어느 눈 내리던 날이었다. ..

근* 글 2018.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