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을 가다 청도 임당리 김씨 고택내시를 찾아서
|   | | ▲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 | 내시를 만나러 간다. 따가운 햇살 사이로 바람이 인다. 비가 그친 뒤라서 그런지 여름날치고는 시원하다.
말간 하늘이 모내기해 놓은 논에 드러누웠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웃을 만들고 이웃과 이웃이 만나 마실이 된다.
대구에서 청도 남산 방향으로 길을 들었다. 굽이를 돌 때마다 인생 고갯길 같던 이 길이 도로 확장을 하느라 분주하다. 앞으로는 평탄한 인생길을 예고라도 하듯 탄탄대로다.
마실엔 국밥집 아주머니 같은 질박한 정이 흐른다. 도시의 삭막함을 버리고 마음이 울울할 땐, 사람 냄새 맡으며 마실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으리라.
시끄러운 마음자리를 가라앉히기에는 여행만 한 것이 없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서로 보듬고 어울려 사는 모습에서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도 든다.
퇴근길에 출출한 배를 부여잡고 소주 한잔을 곁들여 먹는 국밥. 빈자들이 잠시라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넉넉함이 묻어나는 곳. 국밥집 서정이 듬뿍 묻어 있는 곳이 바로 마실 풍경이 아닐까.
청도 임당리 마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택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동네 아저씨가 웃으면서 다가와 어디를 찾느냐고 말을 건넨다. 도시 사람들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한 정이 흐른다.
넓은 논과 몇백 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고목들이 우람하고 당당하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듯 넉넉한 마을이다. 김 씨 고택을 찾아가는 동안 밀성 박씨 삼우정파 종중소장문적을 보관해 둔 사당과 여러 고택이 있다. 마실 어귀에 차를 대놓고 5분 정도 걸어가면 내시 고택을 만날 수 있다.
담장을 끼고 고택을 돌아본다. 그네를 타고 있는 처녀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듯 담장의 곡선미가 눈을 끈다. 굳게 잠긴 문을 열고 발을 들여 놓았다. 시원하고 넓은 고택이다. 고대광실은 이런 집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게다.
역사 속에서만 대했던 아득한 내시 세계가 펼쳐진다. 내시 집이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청도임당리김씨고택이 처음이라고 한다. 중요문화재 245호이며 18~19세기 궁중 내시 김일준이 통정대부 정3품까지 지내고 낙향하여 보낸 곳이다.
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들인 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 생활을 하도록 했던 이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에 이르러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18대 이후 정상적인 부자 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김일준은 이곳에 터를 잡고 어떤 세계를 꿈꾸었을까. 외로운 성전에 거대한 정적이 흐른다. 사랑채 대문에 난 작은 구멍, 그 구멍으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김일준은 구중궁궐의 숨은 권력자로 남기보다는 왕의 수족으로 남고자 함이 컸던 것 같다. 서북향으로 고개를 틀고 있는 고택에서 그의 단심이 보인다.
내시는 왕의 수족으로 평생 육체적인 결함과 마음의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사람이다. 이 집에서 살던 사람들은 다 한 많은 세월을 살지 않았을까. 이 고택은 여성의 동선을 제한하려는 내시가의 건축 구조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이곳에서 살았던 여성조차도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했으니 그 한이 얼마나 깊으랴.
넓은 마당에 풀 한 포기 없다. 풀로도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그런 주인의 마음이 서려 있는 듯해서 짠해진다. 고대광실이면 무엇하리. 누옥이라도 마음 편히 사는 것이 복이 아닐까.
사극으로만 대하던 우리나라 내시의 유래가 궁금해진다. 잠시 마루에 걸터앉아 생각에 빠져 본다. 암막에 가려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내시가 기록상으로는 9세기 신라 흥덕왕 때, 처음 등장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내시 역사도 천 년이 훨씬 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내시가 되기 위한 사설양성소도 있었다고 한다. 그 무대에 쇠귀 할머니가 있다.
고려 초의 구전된 얘기로는 재산이 아주 많은 쇠귀 할머니가 살았다고 한다. 쇠귀 할머니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불행히도 고자여서 근심하던 할머니는 높은 곳에 뒷돈을 대서 궁궐에 내시 벼슬을 얻게 된다. 세도가가 된 내시는 이후 양자를 들이는데 그 첫째 조건이 고자여야 된다는 것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민초들은 자기 자식을 억지로 고자를 만들기도 했으며 돈을 받고 양자를 들이는 악습도 생겼다고 한다. 쇠귀 할머니는 내시가 되기 위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몸가짐과 궁중의 법도, 경국대전 등 다양한 교육을 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  | |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일준도 사정이 여의치 못해 당당한 남성으로 살지 못하고 뼈아픈 시대를 산 것 같아 한쪽 가슴이 저려온다. 400여 년의 한을 안고 서 있는 고택에서 그들의 역사를 읽어 봤다. 내시가 우리 땅에서 사라진 것은 국권침탈이 있기 두 해 전이라고 한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관청을 없애면서 내시부도 폐지했다. 청도임당리김씨고택 내시들의 묘소는 마을 뒤의 재궁산, 중솔산과 운문면 묵방동의 안산에 산재해 있다고 한다.
천상에서나마 행복하길 기원하며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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