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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시 이야기

테오리아2 2014. 6. 2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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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시 이야기
  • 궂은 일은 내게", 궁궐잡부 내시 궁궐 내 여성문제 원천봉쇄, 고자 선발... 고위직은 양자 두기도 궁녀와 함께 궐내에서 상주하는 또 하나의 집단이 내시다.세간에서는 이들을 내시라고도 하고 환관이고도 하지만 내시는 정식 관직명이고 환관은 고려시대 이래 궁중에서잡일을 담당하는, 생리적으로 고자인자들을 통칭하는 말 이들이 담당하는 일은 음식물 감독, 궐문 수위, 청소, 잡심부름 등이다. 업무 자체는 중요하지 않지만 이들은 항상 궁궐에 거주하며 국왕 측근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엄격한 자격이 요구된다. 익히 알다시피 우선 고자여야 한다. 궁녀들과 항상 접촉하며 일하고 궁궐에서 숙식을 하기 때문에 여성과 문제를 일으킬 여지를 아예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한 것이다. 내시들 중 다수는 선천적 고자지만 일부는 일부러 수술하여 거세한 자들도 있다. 일부러 거세하는 풍조는 고려 말기에 환관들이 득세하여 권세와 부를 맘껏 누렸던 데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내시들의 권세와 부의 대명사인 것은 이젠 옛말. 조정에서는 고려 말기와 같은 내시들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 내시들의 정치 참여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품계는 원칙적으로는 종2품까지 오를 수 있게 되 있지만, 당상관(종3품) 이상 진급에는 국왕의 특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하급직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이들은 처나 첩도 거느리고 가계 계승을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일반인의 경우 양자는 반드시 동성에서 들이도록 돼 있지만 이들에게는 특별히 이성의 양자도 들일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어주고 있다. 일반인들이 이들 내시를 보기는 쉽지 않으나 궁궐 밖 효자동과 강남 잠실에 가면 간혹 볼 수 있다. 효자동에는 내시들의 사가가 밀집해 있는데 동 이름 자체가 환관의 별칭인 화자를 따서 화자동이라 부르다. 효자동으로 굳어진 것, 또 강남 잠실은 국책 양잠사업 지역인데 일꾼이 모두 여자라 정부에서 감독관을 파견할 때 주로 내시를 파견하고 있다. <> 제3의 세력, 내시 산 곳곳에 흩어진 무덤의 수는 모두 800여기. 이것이 내시의 묘임을 알려주는 것은 등산로 곳곳에 남아있는 비석의 명문이었다. 통훈대부행내시부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야산. 이곳 역시 산 여기저기에 수많은 상석과 비석들이 방치된 채로 흩어져 있었다. 뚜렷히 남아있는 글자-- 승전색. 왕명을 받들고 전달했던 내시였다. 유원지로 잘 알려진 장흥. 이곳 삼상리는 옛부터 내시골이라고 불렸다. 통훈대부행내시부상세승공극철양위지묘--그러니까 이 묘는 통훈대부라는 품계를 가진 내시부의 상세직을 수행하던 승극철이라는 사람의 묘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맨 마지막의 양위지묘이다.양위지묘, 이것은 바로 승극철이라는 사람이 그의 부인과 나란히 묘를 썼다는 뜻이다.그렇다면 내시에게도 부인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또한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는 추측도 가능한데 과연 그럴까? 국립중앙 도서관 족보실. 이곳에는 내시의 것이라고 알려진 특별한 족보가 한 권 남아있다. -양세계보(족보) 여말선초의 내시였던 윤득부를 시조로 하는 내시 집안의 가계도다. 족보의 구성은 태어나고 죽은 해, 그리고 일생의 행적이 기록돼 있는 일반족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시 족보는 양자의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이 서로 다 를 수 밖에 없다 족보에는 내시의 부인도 함께 기록돼 있었다. 일반인과 다름없이 가정을 가졌던 것이다. -족보의 서문 족보를 만든 이유를 밝히고 있다. 비록 양자로 가계를 이어 가지만 낳은 은혜 못지않게 키우는 은혜도 크기 때문에 이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명 내지 두 명을 입양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재산이나 권력에 비례해 4-5명 양자를 들이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 라 양녀도 들일 수 있는거지. 결혼도 하고 양자도 들이고 양 녀도 들여서 어엿한 일반가정과 똑같은 생활을 했던 것이다. 내시의 후손 김계한 선조 당시의 내시 김계한을 시조로 한 집안의 가계도였다. -올해 일흔한살의 유충현씨. 김계한의 14대손으로 아버지대까지 내시직에 있었다는 이 집안의 마지막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참 준엄했다. 키가 구척 장신이고--여기서 건너 산을 망원경으로 내다 보다가 남의 산에서 나무 하는 사람이 있어 소리 지르면 거기까지 들릴 정도로 목청이 우람했다. 일대의 몸만 성한 사람이라면 무사 기질이 있었을거다. 장엄 하고 건장하시고 글씨도 명필로 잘 쓰고 이 근처의 수원 백 씨들이 벼슬이 높다하지만 만만하게 우리 할아버지를 홀대하 지 못했다. 이땅의 내시의 사라짐 내시가 공식적으로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한일합방이 있기 두 해전인 1908년이다.일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관부를 없애면서 내시부도 폐지된다. 그러니까 1908년부터는 내시가 궁궐에 더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유충현씨의 이 증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내시들도 일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궁궐밖에서 가정을 가지고 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내시들이 궁궐에서 생활하다 궁에서 생을 마쳤다는 우리가 알고있던 상식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내시들도 조선시대 일반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궁궐밖에 집을 두고 출퇴근을 했을까?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내시도 출퇴근을 했다. 경국대전엔 내시부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다. 내시부를 승정원이나 홍문관과 같이 하나의 관부로 인정해 그 조직과 임무를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내시부의 임무 네가지 1. 대내감선. 궁중내의 음식 전반에 대한 감독이다. 2. 왕명출납 두번째가 왕명을 전달하는 전명. 3. 수문 세번째로 궁중의 문을 지키는 수문. 4. 소제 마지막으로 궁궐내의 청소다. 포괄적인 규정일 뿐. 실제로는 궁중의 제사는 물론 왕실의 재산 관리. 궁실의 각종 공사. 궁녀의 감독등. 궁중내의 모든 대소사에 내시들이 관여했다. 내시의 경국대전 품계 -내시의 관직은 종2품의 상선에서 종9품의 상원까지 두었다. 이 중 임금의 수랏상에 오르는 음식을 감독하는 상선이 내시부의 가장 높은 직위였다. 이밖에 상원 상다 상약 상전등 각 관직마다 상세한 임무를 규정하고 있다. 내시부의 전체 정원은 백사십명이었다. 내시의 숫자 정원이 140명이라면 일부 군부대 말고는 이렇게 큰 부대가 없었다. 예를들어 병조나 이조와 같은 육부에서도 판서에서 부터 정랑 좌랑에 이르기까지 정규 관원이 10여명 내외였다. 10여명 내외의 관원들이 일국의 국방이나 인사나 또 교육이 나 이러한 일들을 총잭임졌는데 140명 정도의 관원이 소속되 어 있었다면 대단히 규모가 큰 관서였다고 볼 수 있다. 6조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관부는 궁 밖에다 청사를 두고 있었다. 지금의 세종로는 이호예병형공의 6부의 모든 청사가 있었던 곳이다. 그렇다면 내시부는 어디에 있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내시부의 청사는 한양 북부의 준수방에 있었다. 한성도의 준수방 준수방은 경복궁 바로 옆. 지금의 효자동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내시부도 다른 관부와 마찬가지로 궁 밖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내반원 내시부와는 별도로 궁안에 내시들을 위한 공간이 있었는데 내반원이었다. 내반원은 왕이 업무를 보던 선정전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왕실의 수발을 좀 더 효과적하기 들기 위해서다. 궁궐안에 있는 내반원은 내시부의 파견처인 셈인데 내시들 중 가장 핵심인물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근무 형태 그렇다면 내시들은 어떤 형태로 근무했을까? 내시들은 크게 장번과 출입번으로 나뉘는데 번은 교대로 근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장번은 장기간 왕 가까이 모시는 자들로 장번은 모든 내시들 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왕...더보기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yensee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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