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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글방/염정임

작가에게 그의 글방은 요새나 성城과 같은 곳이다. 그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그만의 성역이며 신성불가침의 성소聖所이기도 하다. 그곳은 혼돈의 세계를 문자로 평정하려는 지난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인터넷의 시대가 되면서 작가는 자신을 그 글방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다. 노트북이라는 휴대용 컴퓨터로 어디서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페나 열린 공간에서 나지막하게 들리는 대화나 음악 소리는 오히려 두뇌 활동에 자극을 준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돈’과 ‘그녀의 방’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세기가 지난 지금 그 언설은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에든버러의 로얄 마일즈에는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를 썼다는 카페가 있다. 아이가 딸린 이혼녀로서 생활고에 ..

동짓햇살 유감/김건수

일 년 중 햇빛을 제일 길게 드리우는 것은 동짓달이다. 거실을 지나 식탁 밑까지 파고든다. 햇빛은 바닥에 반사되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계절에 관계없이 내리비치지만 동짓달의 햇살은 약한 듯 강하다. 그런데 환한 햇살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식탁 밑까지 파고드는 햇빛이 심술궂은 바람처럼 종종 나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식사할 때 발밑을 내려다보면 먼지와 잡티가 하나하나 살아 움직인다. 아내도 이것을 보고 있다. 떠다니는 먼지는 잡티와 만나면 스멀스멀 움직이기도 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도 한다. 이들이 아내의 청소본능, 아니 일하는 본능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모르긴 해도 분명, 식사 후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내는 생각해 낼 것이다. 가볍게 청소기 돌리는 것만으로 끝낼 것인가 아예 걸레까지 총동원해..

한겨울의 풀꽃/전민

거실이 환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럴 일 있을까 싶었는데 화르르 꽃이 터진 것이다. 잗다란 연분홍 꽃잎이 더없이 앙증스럽다. 생긴 모양으로만 보면 풍로초나 앵초꽃을 닮았다. 갓 피어난 쌀알만 한 다섯 장의 꽃잎이 먼먼 은하의 세계에서 온 듯 애잔하다. 콧김만 불어도 날아갈 듯한데 미미한 향기까지 서렸다. 한겨울에 풀꽃이라니. 어리둥절하면서도 반갑다. 흙을 움켜쥐고 사는 것들은 배반을 모른다. 기쁨만 준다. 그런데 가만, 풀꽃 언저리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막 들리는 것 같다. 치, 번듯하지 않다고 외면하더니. 봐라! 나도 꽃 피울 수 있어. 구박할 때는 언제고 참말 염치도 좋다야. 세상 어디에도 의미 없는 존재는 없거늘. 제 발이 저린 나는 뜨끔했다. 지난가을 산길을 가는데 풀 하나가 발목을 잡았다. ..

바이올렛/한경희

오후 햇살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바이올렛 화분에 골고루 비칩니다. 봄맞이로 뭘 들여놓을까 고민하는 제게 화원에서 바이올렛을 추천해주었습니다. 물을 자주 줄 필요가 없고 생명력이 강하다면서요. 저처럼 게으른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싶어 색깔별로 담아 왔습니다. 주인은 마치 큰 기밀이라도 발설하는 양 속닥였지요. “잎사귀를 떼어서 흙에 꽂아두기만 하면 번식이 돼요.” 속는 셈 치고 두툼한 잎 다섯 장을 골라 빈 화분에 꽂았습니다.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었어요. 화원의 말과 달리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기르는 사람이 두어 번 물 준 것 말고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저 미물도 알아챘을 테지요. 식물도 사랑을 주면 꽃과 열매를 더 튼실하게 맺는다잖아요. 볕이 따가워지기..

나무 숲‧수필의 숲 /황소지

허리 수술 후 회복기에 접어들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해서 매일 대신공원을 찾는다. 처음에는 집안에서 5백 보씩 1주일 걷고, 다음은 1천보씩 1주일 걷다가 가까운 구덕산 밑에 있는 공원을 찾게 된 것이다. 남편은 일찍 퇴근해서 걷기 운동을 하루도 쉬어서는 안 된다며 내 손을 끌며 앞장을 선다. 공원 입구에는 자갈이 듬성듬성 박힌 흙길이 정갈하게 닦여 있다. 길 옆 산비탈 바위 틈새에는 철쭉꽃이 피어 있고, 다른 한쪽은 사철나무가 알맞은 높이로 손질되어 있다. 공원에는 1백 년 이상 된 삼나무 수백 그루가 쭉쭉 뻗어 있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잡목들이 층을 이루며 푸른 잎새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길을 따라 조금 거닐면 숲은 싱그러운 나무 향으로 가득하다. 길모퉁이를 돌면 꽃 향기가 코끝을 스치기도 하..

구두와 고무신 / 최병진

엄마 손을 잡고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엄마가 있어서 괜찮았다. 어른들 말을 들으니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인민군이라고 했다. 인민군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인민군에 발각되지 않게 조심조심 빙판길을 걸어야 한다고 엄마는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가죽 구두 굽에서 들리는 “똑똑 딱딱.” 소리가 골짜기에 더욱 크게 울렸다. 아버지가 사주신 구두였다. 한 짝이 언제 없어졌는지 쭈그려 신은 한쪽 발에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구두 소리에 화를 내며 잰걸음으로 앞질러갔다.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욕을 먹으며 길을 걸었다. ​ 밤하늘에 별들은 잠도 없는지 초롱초롱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엄마 등에서 동생도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엄마는 앞서가는..

햇빛 마시기/최원현

“마셔 보세요!” k원장이 내놓은 것은 투명한 유리잔이었다. 묵직했다. 그러나 무얼 마시라는 걸까. 유리컵 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셔보세요!” 다시 독촉을 해왔다. “오전에 제가 한 번 마셨으니 가득 차 있지 않을 지도 몰라요.” 컵을 입으로 가져가 ‘훅’ 하고 들이마셔 봤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햇빛이에요” 그녀의 설명이었다. 내가 지금 마신 건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둔 것이란다. 좀 맹랑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햇빛을 내 속으로 들여보내준다? 그러면 내 속에선 어떻게 반응할까. 갑자기 들어온, 아니 한 번도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한 밝음이 어둠 속의 그들에게 순간적으로 다가갔을 때 어떤..

겨울 연지에서/신일수

시내에서 남쪽으로 8킬로쯤을 벗어나면 예하리 라는 작은 마을에 연못하나가 있다. 연못이라면 농경지 수리이용 때문에 마을 뒤편에 하나쯤 엎드려 있게 마련이지만 내가 찾아가는 곳은 이와 품격이 다르다. 제방에 들어섰을 때 늙은 팽나무와 움츠린 노송들이 찬바람에 수군거리고 못은 가슴 속을 드러낸 채 허탈한 눈만을 뜨고 있었다. 바로 이 못이 내가 즐겨 찾는 연지 이다. ​ 삼천여 평은 실히 넘을 것이다. 못가엔 서걱이는 갈대 잎 소리가 일어서고 말라빠진 연꽃 대궁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다. 청둥오리 몇 마리가 쏜살같이 날개를 턴다. 하늘빛이 고웁다. 꽃을 피워 맺은 연방이 이미 식용, 약용으로 꺾이고 지금은 얼음위에 누워버린 연잎과 줄기들이 파수병처럼 서서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 나는 버릇대로 제방의 끝에..

세수 /정승윤

그 시절엔 거지가 흔했다. 그때는 거지들이 탁발승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다. 곡식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먹던 밥을 퍼주었다. 어머니가 거절하는 경우는 대개 거지가 아침 식전에 온다거나, 멀쩡한 사람이 구걸을 다니는 경우였다. 거절하면 말없이 조용히 가는 사람도 있었고 문간에 붙어 서서 떼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전후에 생긴 고아 거지들도 많았다. 그 애들은 대개 깡통을 들고 다녔다. 길거리에, 다리 밑에, 사직공원 정자에 거지들이 득실득실했다. 거지를 보지 않고 지나는 날이 드물 정도였다. 양지 녘에 거지 남매가 쪼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던 기억도 있다. 몇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서 얻은 밀가루인지, 조그맣게 반죽을 하여 떡 모양도 빚고 국수 ..

빈 듯 찬 듯/최민자

5년 넘게 땅속에서 묵었을 매미 소리를 모카커피에 타서 마신다. 오늘 아침 내 특제 메뉴다. 매미 소리는 먹기 좋게, 적당히 분절되어 커피 잔에 녹아든다. 어떤 소리는 튜브에서 쥐어짜듯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어떤 소리는 톰방톰방 방울져 떨어진다. 짝에게 닿아야 할 노랫가락을 내 잔 속에 빠뜨렸으니 녀석들은 끝내 짝짓기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나온다. 파가니니인지 텔레만인지, 얼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려나,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스쳐 가는 바람에 연연하지 않는 늙은 나무처럼 나도 이제 무엇을 오래 붙들지 않는다. 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게 하고 흘러가는 것들은 흘러가게 놔둔다. 기억해 봤자 금세 잊고 말 터, 대지한한 소지간간(大知閑閑 小知間間, 큰 앎은 느긋하지만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