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137

제3회 시흥신인문학상 대상/친구 W / 이동형

동네 카페에서 난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었고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반가웠다. 언제 장만했는지 모를 구두와 서류 가방, 셔츠 위에 껴입은 털조끼 차림으로 그는 나타났다. 민낯에 티셔츠 와 운동화 차림인 내가 무안할 정도로 그는 차려입고 나왔다. 앞머리를 왁스로 말아올리고 얼굴에선 화장 품 냄새가 났다. 그는 목소리까지 나긋나긋하게 바뀌어 있었다. 하굣길에서같이 웃고 떠들던 예전의 그와 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 모든 것이 꼭 그의 종교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단지 그가 전보다 성 숙해진 탓이다. 그뿐이다. 어릴 때부터 W와 나는 친구였다. 내게서 친구란, 내가 미처 몰랐던 면이 그 사람에게 있더라도 이를 받아들 여 줄 수 있는 관계를 의미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때만 해도..

냇내, 그리움을 품다(제9회 천강문학상 수필 대상) 허정진

냄새는 그리움이다. 문득 아니면 울컥, 그때 그 어느 날의 흔적과 시간을 찾아 영혼의 빗장을 푸는 알레고리이다. 갓 볶아낸 커피 향기, 담장너머 청국장 냄새, 새로 갈아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 그 목도리에서 그 사람의 언어와 체온과 숨결이 느껴지는 체취, 꽃그늘을 지나다 흠칫 돌아보는 향수 내음. 가슴이 먹먹한 날, 무심코 잊고 살아왔던 먼 기억들이 일상을 툭 치고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운 냄새들이 있다. 인간은 아주 다양한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 커피나 꽃들이 가진 특유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눈을 감고도 그 사람의 땀과 체취만으로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다. 후각수용체 신경은 특정 냄새에 대해 한 가지 세포만 존재하기 때문에 수많은 냄새에 대한 정밀한 뇌 지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식욕을 느끼..

수필은 이모티콘이다 / 이혜경

보면 볼수록 웃기는 녀석이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엉덩이를 냅다 들이밀고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가 하면, 고맙다고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도 한다. 슬플 때는 닭똥 같은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은 채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자존심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미안하다고 할 때는 손발이 없어지도록 비벼댄다. 건조하고 딱딱한 글자만으로는 세심하게 전달되지 않는 감정의 결을 오버액션으로 전달해 주는 이모티콘이야말로 문자 메시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약방의 감초다. 처음에는 방정을 떠는 이모티콘이라는 존재가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문자를 보낼 때는 자칫 버릇이 없어 보이지 않을까 싶어 망설여지기도 했다. 자주 보면 정이 든다는 것은 사람에게만 한정된 말이 아니었다. 동..

카테고리 없음 2022.09.29

2018년 흑구문학상 수상작/명태 / 곽흥렬

드디어 동해 바닷가 작은 포구를 벗어났다. 차는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구절양장의 산허리를 휘돌고 돌아 나간다. 대관령의 험준한 고갯마루를 타고 넘어 줄곧 서西로, 서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 현기증으로 머리가 어찔어찔하고 속이 메슥거려 온다. 그렇게 얼마를 지났을까. 탁 트인 분지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느닷없이 나타난 황태 덕장, 끝 간 데를 모르게 늘어선 명태의 군상들이 사정없이 후려치는 칼바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인 채로 꾸덕꾸덕 몸피를 줄여 가는 중이다. 이 깊은 산중에 웬 포로수용소가 있었더란 말인가. 사뭇 절규에 가까운 그들의 고통스런 표정에서, 자유를 갈구하며 몸부림치는 뭇 백성들의 환영幻影을 본다. 한껏 벌린 입에서는 피 끓는 혁명가가 울려 나오..

아등바등 / 이상경 - 제12회 한국의학도 수필공모전 금상

묘하게 알아보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생전보다 특별히 부으시거나 살이 빠지신 것도 아닌데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제야 익숙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시기 전 담도가 막힌 탓에 온통 누렇게 변해 있었기는 해도, 확실히 명절 때마다 뵈었던 그 얼굴이 맞았다. 기묘했다. 그냥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또 아예 사람인 적 없었던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왜 옛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는지 짐작할 것도 같았다. 생명의 마지막 흔적마저 자취를 감춘 얼굴은 마른 강바닥 같았다. 강이었고, 강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넘실거리는 뭔가가 사라져 버렸기에 강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고 이질적인. 천성이 감성적인 엄마는 할머니 옆으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 먼저 ..

육탁 / 김희자

침묵을 비집고 빛줄기가 거실 바닥으로 든다. 겨울 날씨가 봄 날씨 같다고 비웃었다가 된통 욕을 보고 있다. 세상천지가 꽁꽁 얼고 하늘과 땅의 길도 막혔다. 영하 20도. 맹추위는 가난한 사람의 체감온도를 한층 추락시킨다. 냉혹한 바닥을 치고 나갈 탈출구는 어디쯤 있는지. 여자는 지금 미래로 나아가지도,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바닥을 치는 여자의 육신처럼 거실 바닥에 뒹굴던 빛줄기가 파닥거린다. 새벽 어판장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 육탁(肉鐸)과 같다. 화려해 보이는 도시의 군중 속에 말 못 하는 가난이 여기에도 있다. 더는 칠 것이 없는 생의 바닥. 물질도 정신도 모두 바닥이다. 한파가 가슴 깊숙이 파고든 지 오래이니 심신이 꽁꽁 얼음장이다. 그런 여자에게도 봄날은 올까? 물질이 궁색..

우산 / 김애자

희멀건 눈으로 멍하니 쳐다본다. 햇살이 환하면 우산은 현관 귀퉁이에서 무료한 삶을 이어간다. 형형색색이 행렬을 이룬다. 비 오는 날은 누군가에게 들림을 받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하다. 주인의 요구에 따라 반원이 되는가 하면 중세의 사원처럼 뾰족하고 둥근 지붕이 된다.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 지나는 눈길을 잡아채거나, 화려한 색으로 자태를 뽐내며 빗속을 누빈다. 날이 들면 찾아오는 실직의 소식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우산의 걸음이 활기차다. 우산은 임시직이다. 언제라도 불러주기만 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한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쓰임 받는 날은 높은 꼭대기에 오른 것 같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살필 여유도 잠시 뿐, 언제 관심 밖으로 밀려날까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며 가슴을 졸인다. 이십여 년 ..

이소(離巢) / 권상연 - 2019 호미문학대전 흑구문학상 금상

육묘장을 찾았다. 봄기운이 물씬 오른 모종들이 모판에서 키 재기하듯 경쟁적으로 자라났다. 옆 지기의 공간을 침범하여 굵게 자란 녀석이 있는가 하면 비좁은 곳에서 키만 삐죽이 올라온 녀석도 있다. 모판을 벗어나려는 생존 본능은 틈이 조금만 주어져도 달아나려 한다. 이때쯤이면 농가에서는 모종들에게 흔들기를 시작한다. 매정하게 자리를 옮긴다. 비좁은 포트에서 얼마나 숨이 막혔으면 물 빠짐을 위해 뚫어놓은 구멍으로 뿌리를 내렸을까. 이삿짐 빠진 빈방처럼 모판이 옮겨가고 남은 빈자리마다 잘려나간 뿌리들이 허옇게 널브러져 있다. 말못하는 식물이라고 왜 안 아프겠는가.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면역력이 강해진다. 모종이 제금 나기 전까지 농부는 수시로 모판의 자리를 바꿔주고 흔들어 주면서 정을 뗀다. 긴 장..

벽(壁)의 침묵」 김창식

새로 이사 온 동네는 볕도 들지 않는 골목이 얼기설기 미로처럼 얽혔다. 시간이 멈춘 듯 음습한 골목에는 잡풀이 우거지고 악취가 먼지처럼 일렁였다. 그보다 골목을 걷다보면 벽(壁)이 나타나 길을 막는 것이 문제였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어도 또 다른 벽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곤 했다. 벽의 모습은 엇비슷했다. 암적색 타일이나 벽돌로 만들어진 벽도 있었지만, 대부분 우중충한 잿빛 콘크리트 벽이었다. 철 지난 전단지가 붙어 있고, 상형문자 같은 글씨가 보이는가 하면, 얼룩이 진데다 움푹 파여 있기 일수여서 찢겨나간 낡은 지도 같았다. 벽 앞에 서서 벽이 침묵하는 것을 보았다. 벽처럼 여러 의미를 갖는 말도 흔치 않으리라. 일상에서 대하는 거실이나 건물의 벽, 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리거나 담쟁이넝쿨이 간당간당 오르..

조새 / 김희숙(2021 포항스틸에세이 대상)

바위에 부딪친 파도가 하얀 가루로 부서진다. 육지까지 올라올 것처럼 밀어붙이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뒷걸음치는 고양이처럼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그제야 파도에 몸을 내어주었던 바위들이 바닷물 사이로 하나둘 되살아난다. 해안가 사람들이 오밀조밀 동네를 이루듯 갯바위에도 다닥다닥 갯것들이 모여 산다. 숨어 있던 게들이 슬그미 기어 나오고 엎드렸던 따개비와 굴들은 참았던 긴 숨을 토해낸다. 추위가 뻣속까지 스며드는데 낡은 가방을 멘 노인이 얼른거린다.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들었고 다른 손에는 길쭉한 쇠갈고리를 쥐었다. 이 바위에서 저 돌 위로 겅중거린다.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는지 굽은 허리를 더욱 깊숙이 구부린다. 돌돌 말아놓은 거뭇한 보따리 하나 바위에 얹어 놓은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손에 들린 것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