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카페에서 난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었고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반가웠다.
언제 장만했는지 모를 구두와 서류 가방, 셔츠 위에 껴입은 털조끼 차림으로 그는 나타났다. 민낯에 티셔츠
와 운동화 차림인 내가 무안할 정도로 그는 차려입고 나왔다. 앞머리를 왁스로 말아올리고 얼굴에선 화장
품 냄새가 났다. 그는 목소리까지 나긋나긋하게 바뀌어 있었다. 하굣길에서같이 웃고 떠들던 예전의 그와
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 모든 것이 꼭 그의 종교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단지 그가 전보다 성
숙해진 탓이다. 그뿐이다.
어릴 때부터 W와 나는 친구였다. 내게서 친구란, 내가 미처 몰랐던 면이 그 사람에게 있더라도 이를 받아들
여 줄 수 있는 관계를 의미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때만 해도 설령 그의 모습이 낯설어 당황하더라도 이해
와 존중이 있다면 여전히 그와 나는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새 학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변했다. 성경 구절을 근거로 들
면서 병역과 수혈을 거부하겠다. 내게 말했다. 그는 학교 조회 시간에 애국가를 부르지 않았고 분식집에 가
서 순대를 먹지않았다. 나는 그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그와 나는 같은 학교에 다녔고 같은 동네를 살았
음에도 어느 샌가 그는 신을 믿고 있었다. 그건 상관없었다. 다만, 나는 그가 신을 믿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
가 신을 믿는 방식을 뜯어고치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신은 없다고 성경은 일종의 이야기라 말했고 그는 나
에게 성경은 신의 말씀이고 성경이야말로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라 말했다. 며칠 동안 서로 메시지를 보내
면서 싸웠지만, 결판이 나지 않자 결국 우린 서로가 추천하는 책을 읽어본 다음 다시 말해보기로 했다. 나
는 성경을, W는 만들어진 신을 읽기로 약속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에게 어떻게 지냈나 물었다. 그는 같은 종교인들과 함께 봉사나 포교를 한다는
데 오늘도 일정이 잡혀있다 했다. 그는 이어서 내게 물었다. 내 꿈과 취미, 주말에 뭐 하는지, 여전히 책은
읽는지 등등. 우린 서로 변함없는 데가 있는지 열심히 찾아 헤맸다. 학생일 때와 달리 그는 이제 신자가 되
었고 나 또한 머리가 굵어졌다. 우리는 오래된 그 주제를 회피하려 했다. 아무리 말해도 우린 결코 생각이
맞을 리가 없다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친구를 바로잡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고 나 역
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함께 읽어보지 않겠냐면서 서류 가방에서 태블릿PC를 꺼냈다. 전자책 성경이었다.
군데군데 밑줄까지 쳐져 있는 그 성경을 잠깐 쳐다봤다가 나는 다 마신 컵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컵 안
이 우리가 보는 세계다. 컵 밖은 세계 바깥이고, 신은 이 컵 밖에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건 이제 믿음
의 문제다. 나는 입 다물고 있는 거고 너는 믿고 있는 거다. 나는 매듭 짓고 싶었다. W는 시간이 다 됐다며
일어섰다. 강요는 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전처럼 그의 집까지 함께 걸어가면서 우리는 그가 학생 때 샀던 카메라로 같이 사진을 찍으러 다니자는 얘
기를 했다. 그는 꼭 그러자고 말했고 그의 집 앞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추천한 책은 읽어봤냐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나 역시 몇 쪽 쭉 읽다가 관뒀으니까. 그때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다. 그는 바쁘단다. 난 내카
메라를 들고 가끔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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