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치마 / 김응숙

테오리아2 2022. 8. 1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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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 한 줄기가 발목을 지나 종아리를 휘감고는 사르르 사라진다. 땅속 깊고 뜨거운 곳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입김 같다. 볕바른 산등성이에 이는 아지랑이처럼 풋내가 가득하다. 햇살을 꼬아 만든 비단실마냥 살갗에 친친 감긴다. 그런 바람이 자꾸만 아래에서 위로 분다.

 

  이미 앞산 진달래를 흔들고 개울가 개나리를 깨운 바람이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땅이 물러지고 나뭇가지가 부드러워진다. 간밤에 내린 봄비의 빗방울 같은 색색의 멍울이 부풀어 오른다. 마침내 그 작은 것들이 치마를 펼친다. 민들레는 노란 갈래 치마를 입었고 패랭이꽃은 분홍 캉캉치마를 입었다. 각시붓꽃이 입고 있는 것은 보라색 드레스이다. 불쑥 호기어린 바람 한 자락이 내 치맛단을 흔든다.

 

  치마를 빠져나간 바람은 철쭉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쪽으로 향한다. 철쭉은 다홍색 치마를 입고 있다. 여인의 긴 속눈썹 같은 숱 많은 꽃술을 가진 통꽃이다. 가느다란 갈색의 가지 끝에 매달린 꽃이 속눈썹을 떨며 살짝 얼굴을 붉힌다. 그 옆의 꽃도 덩달아 붉어진다. 바람이 불고 다홍색 치마가 물결친다.

 

  막내이모가 치마를 펼치자 어둑한 다락방은 금세 다홍빛으로 물들었다. 얇은 갑사 두 겹이 서로를 얼비치며 사각거렸다. 지붕 밑에 나있는 작은 창으로 겨울의 눅은 햇살이 비쳐들었다. 햇살은 갑사에 직조된 수많은 석류 문양을 비추었다. 이모의 늙고 투박한 손이 치마를 쓰다듬었다. 해묵은 세월이 다락방에 가라앉았다.

 

  이 다홍치마는 외할머니가 시집오실 때 입은 것이라 했다. 혼례식 날 활옷 밑에 받쳐 입은 치마이다. 백 년도 더 지난 오랜 옛날의 일이다. 열여덟, 갓 벙글어진 꽃봉오리 같은 나이에 시집오신 외할머니는 아들 넷에 딸 넷을 낳았다. 그러나 위로 아들 넷이 줄줄이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혹독한 바람이 부는 세월이었다. 다홍치마에 피맺힌 모정이 얼룩졌다.

 

  바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1.4 후퇴 때 남은 네 딸을 데리고 국군을 따라 평양에서 부산까지 피난을 왔다. 정신없이 꾸린 봇짐에 다홍치마가 들어 있었다.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 때였다. 금비녀를 팔아 거처를 구하고 쌍가락지를 팔아 여섯 식구 끼니를 이었다. 대구의 한 시장에서 찐빵과 만두가게를 차려 그나마 안정을 찾을 때까지 온갖 것들이 팔려나갔다. 그런데도 다홍치마는 남겨졌다. 저고리는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물 묻은 손으로 시장통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야했던 외할머니의 궤짝 깊숙이에는 다홍치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꽃은 식물이 피워내는 꿈의 절정이다. 꿈이 스친 자리에 열매가 맺히듯 치마가 펼쳐진 곳에는 생명이 깃든다. 생명은 그 치마폭에서 자라난다. 애초 훈풍을 허락하는 순간 가슴에는 지울 수 없는 모정이 새겨진다. 시린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이리 감싸고 저리 품으며 견디고 또 견딘다. 어미의 치마는 질기고 강인하다.

 

  서울로 올라온 외할머니는 딸들을 독일로 유학 보냈다. 비록 아들들을 잃었지만 딸들이라도 남 못지않게 키우고자 하셨다. 오랜 뒷바라지가 따랐다. 그런데 돌아올 줄만 알았던 두 딸이 독일 남자와 결혼해 그곳에 눌러앉았다. 외할머니는 막내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다홍치마를 독일로 보냈다. 온갖 역경을 이긴 치마가 타국에서 딸에게 닥칠 어려움을 자신을 대신해 막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다홍치마는 그런 염원을 싣고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유럽 저택의 드레스룸에 걸렸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푸른 눈의 사위가 외도를 한 것이다. 막내딸은 자신을 더 닮은 세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 짐 속에 다홍치마가 구겨져 있었다. 줄담배 연기가 치마폭에 스미고 독주가 흘러 얼룩을 남겼다. 하지만 모진 바람이 자면 저 깊고 뜨거운 곳에서 또 다시 훈풍은 불어오는 법이다. 새로운 사랑이 다홍치마에 깃들고 새 생활이 시작되었다.

 

  꽃이 진 자리에 다시 피는 꽃은 갸륵하다. 시들며 말라가던 꽃잎의 기억을 잊기는 어려웠을 게다. 뒤틀리며 꽃받침에서 떨어져나가던 아뜩한 순간은 선연한 통증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동통을 이기고 꽃이 피듯 다홍치마는 다시 펼쳐졌다. 치마에는 과거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변화하며 나아가는 용기가 숨어있다.

 

  이태 전 겨울 나는 이모를 찾아갔다. 이모는 내 손을 잡고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랐다. 무성한 자작나무 숲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집 지붕 아래 천장이 높은 서양식 다락방이었다. 낡은 트렁크에서 다홍치마를 꺼낸 이모는 내 앞에 치마를 펼쳐보였다. 주름 겹겹이 스며있던 오랜 세월이 잠시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이모는 이 치마를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어 했다. 나는 돌아오는 짐을 싸며 트렁크 한 쪽에 다홍치마를 넣었다.

 

  이제 다홍치마는 내 장롱 바닥에 들어있다. 여인 삼 대를 거치며 이런저런 바람에도 백 년의 세월을 견딘 치마이다. 오므리면 별 것 아니어도 펼치면 세상을 덮는 것이 여인의 치마이다. 인내하고 견디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서슴없이 용기를 내어 변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낌없이 사랑을 품고 생명을 기른다. 그 치마폭에서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다.

 

  애기똥풀 옆에 제비꽃이 피고, 꽃마리 옆에 꽃다지가 핀다. 둘러보니 대지는 이미 꽃무늬 치마를 둘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산들이 입고 있는 것은 갈피갈피 생명이 깃든 파스텔 톤의 겹치마이다. 피어나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다 치마로 보인다. 흔들리며 출렁이며 끝없이 치마가 펼쳐지고 있다. 그 치맛단을 훈풍이 들어 올린다. 귓바퀴에 뜨거운 입김이 스치고,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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