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초록을 품다 / 강표성

테오리아2 2022. 8. 1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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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록 그늘이 출렁인다. 절 입구에서 경내까지 오리나 된다는 숲길이 부산하다. 느티나무, 팽나무, 갈참나무 이파리들이 봄빛을 쟁이느라 반짝거린다. 춘 마곡 추 갑사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봄만 되면 나는 갑사 쪽으로 기운다. 벌써 초록이 고픈 게다.

 

매일 흰색 풍경에 젖어 사는 에스키모 인들은 흰색을 수십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는데, 우리에게 녹색이야말로 그러하지 싶다. 나무마다 색감이 다르다. 같은 나무도 어제 나온 이파리와 오늘 나온 그것이 다르고, 앞뒤 혹은 위아래에 따라 색의 깊이와 파장이 제각각이다. 햇살이 미끄럼을 타는 애채는 파릇파릇하고, 새 싹을 피워낸 나무초리는 푸르스름한가 하면, 거친 줄기마다 푸르죽죽하고, 오래된 졸가리는 검푸레하더니, 뿌리에 가까운 밑동은 갈빛으로 옮겨간다. 그들의 음영과 농담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영역이다.

 

숲은 푸른 신전이다. 꽃은 피어 열흘을 붉지만 초록은 날마다 푸르러 새로운 그늘을 펼친다. 그 아래 서면 박하사탕을 머문 듯 화안해진다. 푸른 숨결에 가슴이 열리고 상큼한 기운이 몸 안에 고이기 시작한다.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된다. 서늘한 광채에 휩싸여 어린잎처럼 혹은 세상모르는 아이처럼 몸도 마음도 가뿐해진다.

 

대여섯 살 무렵이었지 싶다. 아버지가 대처에서 옷을 사왔는데 입자마자 아랫집으로 내달렸다. ‘아빠가 간따앙구 사왔당’ 이어지는 추임새, ‘아따, 참말로 이쁘다잉’. 원추리 이파리 같은 그걸 입고 마구 깡충거렸다. 원피스보다는 ‘간따앙구’라는 일본말에 익숙하던 시절이라, 나일론 소재의 연초록 원피스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이다. 치마 부분에 자잘한 주름이 달려있던 그 옷은 나를 소공녀로 만들고도 남았다. 그 후로도 초록은 내게 늘 유효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을 때면 녹색을 기웃거린다. 입에 쓴 물이 가득 고일 때, 마음이 쑥대밭 같을 때면 나무 그늘을 찾는다. 울울창창할수록 좋다. 거친 숨결을 다스리며 헉헉 대노라면 그들은 내 몸의 신호를 경청한다. 호들갑 떨지 않고 억지로 연민의 표정을 짓지 않고 묵묵히 지켜본다. 말없이 어깨를 다독이는 녹색 물결들, 그제야 풍경이 내 안으로 걸어온다.

 

숲은 푸른 문장들로 가득하다.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 않는 명문장이다. 온 몸으로 읽는 줄글이 얼마나 부드럽고 아늑한지 마음이 가득해진다. 나무에 잠시 기대는 것만으로도 평안을 얻는다. 괜찮다 괜찮다, 속삭이는 잎새에 파묻혀 내가 걸어온 길을 잠시 내려놓는다.

 

새도 은빛 소리로 몇 음절 읽다 가고 바람도 몇 마디 들추다가 사라진다. 푸른 잠언의 숲, 거기서는 행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밑줄을 긋거나 괄호 표시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스치거나 잠시 앉아있으면 저절로 넉넉해진다. 솜털 하나하나 다 열리어, 온몸으로 스며드는 기운을 받아들면 그만이다. 더할 나위 없는 위로의 편지, 따뜻한 처방전이다.

 

이 세상에 초록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세상이 온통 하얀 알래스카 지방, 회색으로 빛나는 툰드라 지역, 붉은 색으로 빠져드는 사막 지대는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풀빛의 넉넉함과 나무의 생기를 맛볼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먼 유배지에 내몰린 듯하다.

 

삶의 현장에서도 초록은 필수다. 길을 가다 보면 도처에 신호등이 있다. 성급한 마음에 길목을 지나치려면 금지표시가 발목을 붙잡는다.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 작은 길 하나 건너는데도 그런데 하물며 인생은 어떨 것인가. 머잖아 초록불이 나오겠지, 그 믿음으로 생의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다. 이럴 때의 그것은 희망의 색이자 질서의 색이다.

 

빨강이 뜨겁다면 파랑은 차가운 색이다. 이를 중화시켜주는 것이 녹색이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보다는 한 발 물러나 중립을 지킨다. 어디서나 스스럼이 없이 어울릴 줄 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는 포용력으로 다가서기에 보색인 밤색과도 잘 어울린다. 나무와 땅처럼 서로를 받쳐주니 주위에 생기가 흘러넘친다. 하여 조물주도 해가 바뀌면 녹색 붓을 제일 먼저 드시나 보다.

사람은 좋아하는 걸 닮아간다고 한다. 녹색을 볼 때마다 내 삶도 그리 물들기를 바란다. 그것이 주는 기쁨을 배우고 싶다. 어디서나 편안하고 넉넉한 바탕이었으면 한다. 꽃처럼 주목받지 않으면 어떤가, 온화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면 족하다. 주위를 아우를 수 있는 균형감각 또한 잊지 않기를 빈다. 잠시 반짝이는 것보다 오래 바라볼 수 있는 편안함이 좋고, 비바람에 쉬 흔들리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런 마음은 이어졌다. 얼마 전에 딸아이의 옷장에서 연초록 원피스를 발견했다. 순간, 작은 요정이 내게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 애로 인해 얼마나 행복했던가. 내 생애에서 보석 같은 순간들이었다. 내 아버지가 그러신 것처럼 나도, 딸애에게 연초록 원피스를 입히면서 뿌듯했다. 그 애 인생이 늘 봄날 같기만을 바랐고, 싱그럽고 부드러운 성정으로 어디서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길 빌었다. 삼십 년도 더 된 옷을 장롱에 다시 넣으며 새로운 주인공을 기다리기로 한다. 머잖아 우리에게 올 또 다른 생명.

 

나이 들수록 초록에 열광한다. 이와 비슷한 시간대가 많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나무들이 광합성을 하듯, 사람도 해마다 푸른 시간이 돌고 돌면 좋으련만. 나무로 치면 밑동이 완만해지고 거친 옹이도 여기저기 보인다. 속절없이 속만 비어가는 나무 그루터기를 닮아갈까 봐 눈길은 늘 잎새에 머물지만.

 

봄 숲에 와서 인생을 다시 생각한다. 사람 또한 새순일 때가 있고 물들 때가 있고 낙엽으로 내려앉을 때가 있다. 그 시기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것, 미련 없이 자리 내어줄 준비를 하는 것이 바로 초록이 주는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시간을 아끼며 즐기려 한다. 머잖아 기회가 오면 딸을 빼닮은 아이를 앞세우고 갑사의 오리숲길을 거닐고 싶다. 애채처럼 빛나는 생명과 손잡고 걷는 길, 상상만으로도 내 안에 봄물이 고인다. 내 영혼이 저절로 광합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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