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붉은 길/ 김정화

테오리아2 2022. 8. 1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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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붉다. 강바람에 흔들리는 배롱나무 꽃무리 사이로 매끄러운 햇살조차 붉은빛으로 되쏜다. 붉은빛은 화려하고 요염하지만 배롱나무의 붉은색에서는 기품마저 느껴진다. 석 달여 동안 꿋꿋이 꽃대를 밀어올릴 나무의 성품은 붉다 못해 혈기로 곧다. 배롱나무 앞에서는 가물이나 폭염조차 기운을 삭힐 듯하다. 우직한 장수의 붉은 단심이 배롱나무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매미 울음이 여름을 만드는지 여름이 매미울음을 만드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영웅은 결코 울음소리에 숨어 있을 수가 없다. 선비가 칼을 뽑은 것이다. 선비는 원래 붓으로 싸우고 무인은 칼로 싸운다. 붓은 평화 시절에, 칼은 난세에 필요한 연장이지만 나라를 사랑한 진정한 인물은 붓과 칼을 함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이 그를 홍의장군이라 칭하였다. 백마를 타고 홍의를 날리며 싸우던 그는 왜병에게 귀신 같은 존재였지만 조선 백성에게는 신 같은 존재였다. 그는 단순히 용기만 가진 인물이 아니라 지혜도 겸했다. 똑같은 홍의를 입힌 매복병들을 왜군이 지나는 길목에 배치하여 교란을 꾀하기도 했다. 그가 이끄는 의병 전투는 승전이 이어졌는데 무엇보다도 붉은 옷의 몫이 컸다. 장수의 위엄과 애국심이 붉은빛으로 나타났으니 어찌 적이 두려워하지 않았겠는가.

배롱나무 붉은 길 사이로 남강변이 눈에 들어온다. 정암진 나루가 있는 곳이다. 정암진은 물이 워낙 깊은 데다 얕은 곳은 진창이어서 당시 왜병은 마른 곳으로 강으로 건너고자 곳곳에 말뚝을 세워놓았다. 장군이 이를 간파하고 말뚝을 엉뚱한 곳으로 옮겼고 이에 속은 적은 진창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수풀 속에 매복한 의병들의 공격에 적장은 그날의 대패를 두고두고 후회하였다고 전해진다. 굽이쳐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니 서릿발 같은 호령소리가 아직도 남아있는 듯하다.

정암진 전투의 대승에 장군은 징과 꽹과리를 치며 횃불을 높이 들었다. 마치 처용무를 추듯 붉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면서 홍의의 승전무를 베풀었지 싶다. 당당한 징 소리에 적의 사기는 떨어지고 장엄한 호기에 감히 근접하지 못했을 게다. 고려인이 처용의 화상畵像으로서 잡신을 물리쳤듯이 의령 사람들은 홍의장군의 기상을 철옹성으로 여겼기에 난군을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의령천 길가에는 백일홍이 양옆으로 피어 있다. 나는 여름에 이 길을 찾은 것이 너무나 다행이다 싶다. 그 길을 지나 충익사로 들어서는 입구에서도 붉은 배롱나무가 이방인을 맞아준다. 홍의장군의 명령을 받은 병사인 듯 하여 반갑기 그지없다. 손 끝에 닿은 붉은 기운이 온몸을 감싸준다. 여름 오후라 내방객이 없어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전시관 전면에 붉은 도포를 입은 장군이 백마에 앉아 있었다. 기마상의 위용 넘치는 모습과 함께 “논공행상은 논하지 말라.”라고 유시한 내용이 귓전을 메운다.

그때 칠십 노인 한 분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구경꾼인가 하여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이곳 문화해설사였다. 그분은 무엇보다 기마상도의 신비한 현상을 설명해 주고 싶어 했다. 바닥에 그려진 노란 선을 따라 다녀보라고 했다. 그가 일러준 대로 장군의 초상화를 마주한 채 발걸음을 앞뒤로 옮겼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장군이 탄 백마의 눈이 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착시 아닌 착시현상이 방문객의 마음을 옭아맨다. 충혼은 죽어서도 살아 숨 쉬는 것일까. 아니면 내 마음속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지켜보는 눈길은 아닌지. 두렵기도 하고 경외롭기도 하다.

한때 조정은 그를 외면하였다. 눈을 부릅뜨고 나라를 지켰는데 병기 도적으로 몰린 것이다. 눈먼 사람들 속에서는 눈 뜬 사람이 제구실을 못하게 마련이다. 끝내 장군을 죽이라는 방까지 붙었다. 사필귀정이라 누명은 벗겨졌으나 그의 가슴에는 전쟁보다 더 큰 상처를 안게 되었다. 거짓말이 귀를 어지럽히는 세상을 한탄한 채 임금의 허락 없이 군영을 떠났기에 귀양살이도 비켜갈 수 없었다. 2년간 유배 후 고양에 돌아온 장군은 망주정이란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세상의 근심을 잊는다는 정자 이름처럼 세상을 잊는다 하였지만, 어찌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영창대군을 신구하는 상소문을 올린 이유도 곧은 성품 때문이 아닌가 싶다.

충익사를 나오는 발걸음이 느려진다. 한 그루의 배롱나무가 눈에 뜨인다. 연못 속에도 붉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당당히 서서 햇불마냥 진홍빛 꽃을 피워 올린 나무는 한 그루이지만 내 마음에서는 두 그루로 새겨진다. 한 그루는 장군의 행적이고, 다른 한 그루는 장군의 일깨움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나무 곁을 쉬이 떠날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도 붉은 가로수가 가지를 흔든다. 배롱나무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한다.’라고 한다. 의령에는 유독 배롱나무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군민들은 배롱나무 가로수를 심으면서 홍의장군의 생애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나에게 장군을 소개해 준 초로의 해설사조차 배롱나무에서 뜨거운 의분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의 배롱나무는 홍의병목紅衣竝木이다.

부산이 가까워져도 붉은 길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나무 가로수가 왜 없지 않을까마는 어느덧 내 눈에는 배롱나무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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