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비행기를 탄다. 가족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위한 2박 3일 일정이다. 행락객으로 제법 붐비는 공항에서 제복 차림의 사람들과 마주친다. 왠지 그들에게 정감이 간다. 업무 시간에 멋진 옷을 입고 일하는 건 그들만의 특권이다.
공항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복장은 믿음이 가고 신뢰를 준다. 내근직의 근무복도 보기 좋지만, 조종사나 승무원들의 제복은 더 맵시가 있다. 깨끗하게 다림질되어 있으니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은 항공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더더욱 언행에 신중할 것 같다. 얌체 같은 승객에게도 친절할 수밖에 없는 건 제복 때문이다. 서비스 정신이 투철해서라기보다는 비행기의 안전을 위해 손님의 비위를 맞춘다. 기내에서 난동을 부리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까닭이다.
제복은 어떤 집단의 가치나 팀워크를 상징한다. 요즈음에는 유니폼이란 말이 더 많이 쓰인다. 유니폼을 입으면 소속감과 일체감을 느껴 개인의 개성이 복장 뒤로 숨는다. 그렇다고 사생활까지 제복을 입은 마냥 행동할 필요는 없다. 제복을 착용할 때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옷을 입은 사람의 신념이 밖으로 표출되는 게 제복의 심리학이다.
제복이라면 군복을 빼놓을 수 없다. 군복은 군대의 제복이다. 정복을 입고 사열이나 행진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가슴 벅차게 만든다. 유럽의 궁전을 지키는 보초병처럼 ‘멋짐’이 폭발하면 젊은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것이다. 다림질로 빳빳한데다 멀리서도 식별이 잘 되는 화려하고 박력이 넘치는 옷이다. 복장에 매료되어 남자들은 군에 지원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고, 여자들은 제복 애인을 고르기도 한다. 이런 멋진 제복도 잘못된 이념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면 잔인한 피를 부른다. 제복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가족 사진첩에는 제복을 입은 내 모습도 보인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입었던 교복, 군대 시절의 군복이 그것이다. 싱그러운 느낌을 주는 건 역시 학생복이다. 학교는 학생의 집안이 부자건 가난하건 같은 복장을 요구했다. 덕분에 나처럼 가난한 학생들 얼굴에도 주눅이 들지 않도록 하는 팩과도 같았던 게 교복이었다. 군복은 내 얼굴을 구릿빛으로 영글게 했고 자신감을 넘치게 했던 배터리였다. 내 지나간 청춘을 빛내 주거나 보호막이 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교복과 군복이라는 제복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접하는 제복은 군인이나 경찰직, 소방직의 제복이지 싶다. 그들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희생한다. 제복을 입지 않았다면 굳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일례로 경찰관의 제복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언제든지 경찰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공권력의 상징이자 치안의 주체이니 경찰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그들에게 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권한 등 특권을 부여하는 이유는 다수의 믿음 때문이다. 불의와 불법에 타협하지 않는 정의로운 경찰이자 소명의식이 마음의 바탕일 것이다.
직업인의 제복은 명예와 신용의 상징이다. 고객이나 민원인을 품위 있게 모시겠다는 의지가 엿보여야 한다. 같은 제복을 입고 있어도 모두 친절하거나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기분에 따라 손님을 응대하거나 타성에 젖어 건성으로 일하는 제복을 보면 왠지 불편하다. 불친절한 제복은 대개 고액 연봉과 좋은 대우를 받는 직장에 많다. 어쩌다 그런 제복을 보면 괜히 심술이 난다. 당신 급여를 주고 있는 게 누구냐고 따지고 싶지만 꾹 참고 돌아선다.
나도 한때 은행 직원으로 있었다. 남자 직원의 기본 복장은 양복을 착용해야 했다.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어야 고객들도 안심하고 돈을 맡겼다. 여자 직원은 계절마다 다른 유니폼을 입었다. 정직과 신용을 상징하는 제복이나 마찬가지였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대에 은행에 다니는 자식을 두는 게 당시 부모들의 꿈이기도 했다. 지금은 세태가 변해 은행의 근무 복장은 청바지와 티를 입기도 한다. 은행 유니폼도 시대의 변화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제복을 보면 경의와 선망의 눈으로 쳐다본다. 연봉이 높거나 권력을 가진 기관에 소속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연봉이 낮거나 육체노동을 하는 제복에게는 은근히 낮추어 보고 무시하기까지 한다. 편견과 차별의 눈초리보다는 그에 걸맞은 직무를 수행하느냐로 바라볼 일이다. 제복이란 대충 걸쳐도 되는 그런 의류가 아니다. 지위 고하나 직장을 막론하고 사명감이라는 품격으로 차려입는 옷이다. 책임과 희생정신이 없는 제복은 허수아비의 치장이나 다름없다.
자유복 차림의 직업인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제복을 입고 있다. 공적인 대민 업무이든, 일반 회사나 소규모 가게에 다니든, 사람이나 동물을 돌보는 직무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복장은 개성이 있지만, 언행에는 절도가 있어야 한다. 공공직 종사자는 공복公僕 의식이 있어야 하고, 영리를 추구하는 직무도 윤리 의식이 필수다. 생명을 보살피는 소임은 돌보는 상대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제복이 사람의 정신을 정리 정돈하게 만든다.
제복을 입는 순간,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이나 환경은 제복 뒤로 묻힌다. 제복에는 타인의 신뢰가 담겨 있기에 제복을 입으려는 사람은 누구든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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