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소금밥 / 원준희

테오리아2 2022. 8. 1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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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으로 밥을 먹었다. 해방을 맞이한 조선인 동네는 술렁이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났다는 기쁨보다 고국으로 들어가냐, 또는 남느냐 결정하는 것이 먼저고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서로 묻고 답하느라 법석이었다. 만주는 조선보다 절기가 빨라 들녘에는 벼가 누릇누릇 익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힘들게 마련한 농토이지만 공산당 정권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무엇보다 신앙생활을 무섭게 탄압한다는 풍문도 나돌고 있어서 결국 우리도 친척들과 같이 떠나기로 했다. 고향을 떠나 먼 곳에 이민 와서 겨우 기반을 잡고 이제 살만했는데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이 서글프고 아쉬웠다. 집과 농토를 헐값에 넘기고 가축을 팔아 여비를 마련하여 긴 여행에 필요한 옷· 이불· 취사도구· 양식 외에 미숫가루· 엿· 육포· 반찬· 볶은 소금을 준비했다.

 

어머니는 젖먹이를 업고 아버지 배낭 위에는 어린 동생을 앉히고 나는 걷는다. 만주국 북안성 경성현 칠도강촌 창신동(滿洲國 北安省 慶城縣 七道崗村 昌新洞)은 우리 형제들의 태생지다. 일본의 이민 정책으로 우리 가족은 만주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는 고통스러운 여정의 시작이다. 자동차가 귀한 때라 기차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미 많은 사람으로 차내 선반까지 들어차 있어 빈틈이 없다. 거기에다 건장한 만주 노동자까지 창문으로 계속 올라오니 어린애들을 데리고 있는 부모로서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석탄을 태우는 기차는 화물차 객차 구분이 없고 객차 지붕 위까지 올라가 추락하지 않도록 띠로 서로 연결하는 가족도 있었다. 그나마 차를 놓치면 철길 따라 다음 역까지 걸어야 했다.

 

집을 떠난 지가 오래되니 여비가 떨어지고 준비해 온 부식도 바닥이 났다. 때가 지났으니 서둘러 식사를 한다. 역 부근에서 나뭇가지를 주어다 밥을 짓고 둘러앉아 준비해온 소금으로 식사를 한다. 건건이가 없이 맨밥으로는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소금밥은 처음부터 물에 소금을 타서 밥을 짓기도 하고 소금물을 적시어 주먹밥을 만들기도 한다. 간단한 소금 한 가지가 여러 방법으로 밥을 먹게 만든다.

 

소금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나트륨 중독으로 쇼크사 할 수 있으니 적당량을 지켜야 한다. 무엇이나 정도가 지나치면 위험한 독이 된다. 이런 현상은 소금뿐만이 아니다. 유익한 조미료도 독이 될 수 있다. 가끔 우리는 소금 밥상이라는 말을 듣는다.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으로 건네는 겸허한 인사다.

 

소금밥을 먹으면서 고향 근처까지는 무사히 도착은 했으나 고개를 들고 친척 집에 찾아갈 수가 없다. 타지에 나갔다가 금의환향이 아닌 거지 가족 신세로는 안 된다. 또한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도 산골 고향에 정착하기보다는 문화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하겠다 판단하시고 장수군 계북면 월현리 산골을 외면하신 것이다.

 

여기저기 정착지를 찾아다니다 군산 인근에 일본인이 이민으로 와서 농사를 짓다 돌아간 빈집이 있고 농사일이 많다고 하여 찾아갔다. 일인이 살던 기와집은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먼저 다 차지했다. 조합 직원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니 조합 옆 빈 곳간 집에 우선 머물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얼마 후에는 초가집을 알선해 주었다. 잠자리를 찾아서 이 집 저 집으로 헤매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대궐이다. 집이 마련되었으니 부지런히 일하였다. 만주보다 절기가 늦어 마지막 가을걷이를 하고 있어서 겨울 양식은 충분하다.

 

일본의 패전으로 우리는 만주에 이민 갔다가 되돌아 왔고 일인들은 이민 왔다 되돌아 간 상황이다.

 

이곳 해성5구는 일본 정부가 계획적으로 개간해서 자국민을 이주시킨 큰 동네다. 우리는 집과 농지 2필지를 정부로부터 연부 상환 조건으로 배정받았다. 근검절약하고 가족이 합심해 노력한 결과 상환을 끝내고 이제 5필지나 되는 대농이 되었다. 천주교 신자는 홀로였으나 부모님께서 열심히 선교한 결과로 신자 세대가 차츰 증가하였고 부친은 공소 회장으로 임명되셨다. 우리가 사는 집은 공소로 사용하기에 너무 비좁다. 모든 신자들이 합심해서 장차 강당 신축을 목표로 해마다 가을과 여름에 곡식을 거출하여 출리를 하고 농번기에는 노동력으로 기금을 부지런히 적립했다. 18년 후인 1975년 6월 4일에 35평 강당을 완공하여 시내 여러 신부님과 교우를 초대해 축성식을 했다.

 

이제 그 어르신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부모님과 여러분의 그때의 열정과 신앙심을 되새겨 보면서 천상에서 영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한다.

 

살다 보면 내놓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고달프게 살았던 그때를 잊고 약간의 삶의 불편함에도 짜증을 내고 반찬 투정을 할 때가 있다. 소금밥도 달게 먹었던 지난일을 까마득히 잊은 것이다. 국가와 수많은 가정이 붕괴되었던 그 시절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금밥을 먹으며 꿋꿋이 살아온 지난날이 가끔씩 회상되는 것은 왜일까? 뜬금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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