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수필 방

야생화에게 경배를/ 김근혜

테오리아2 2022. 9. 1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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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생화에게 경배를/김근혜

 

 

 

  복면한 겨울이 길기만 합니다. 봄의 문이 빨리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개화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람이 전하는 말에 귀를 세워 봅니다. 기다리던 꽃 소식을 지인이 전해왔습니다. 장비를 짊어지고 좁은 산길을 한달음에 달렸지요. 내 망막 속으로 보랏빛 물결이 일렁거렸습니다. 가슴에 꽃 수가 새겨지는 순간입니다. 겨울 이불을 개킨 청노루귀들이 실개천 사이로 다붓다붓 수를 놓았네요. 바람꽃도 눈을 반짝이며 살랑살랑 안부를 물어옵니다. 누워있던 얼레지도 덩달아 몸을 일으킵니다. 한 세계가 꽃으로 피었습니다. 야생화들이 봄 햇살에 눈이 부신 듯, 치마폭으로 살짝 얼굴을 감쌉니다. 영혼마저 왈칵 쏟아내서 만든 아름다움이어서 더 경이롭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청초한 모습으로 서 있네요. 그 자태가 의연하고 고고합니다.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부러질 것 같습니다. 가녀린 몸으로 야무지게 언 땅을 뚫고 나오는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꽃들에도 기다리는 봄이 있어서 안간힘을 다한 건 아닐까요. 생의 의지를 보며 동면하고 있는 세포들을 깨웁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모든 생물의 공통점일 겁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꽃물이 떨어집니다.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을 대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꽃은 무난히 맞은 봄이지만, 야생화는 홍역을 치르고 얻은 대가입니다. 벼랑 끝에서 흙 부스러기를 붙들고 일어서는 생의 힘이 숭고해 보입니다.

 

  깊고 넓은 바다에 있는 듯 좀체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군요. 야생화를 맞이하는 설렘으로 며칠 밤을 지새운 탓입니다. 앵글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는 작가들이 눈에 띕니다. 야생화는 그저 보여줄 수 없다는 듯이 콧날을 한껏 세웁니다. 한없이 낮춰야 겨우 얼굴을 보여주는 꽃입니다. 신 앞에서 경건하고 엄숙하게 예를 갖추듯, 야생화 앞에선 누구나 겸손한 자가 됩니다. 누군가에게 수그려 본 적 없어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몸을 낮춥니다. 야생화는 낮추는 자를 고요히 품습니다. 나도 그들 틈에서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고 숨을 고릅니다. 낮추고 낮추려 해도 높아지려는 욕망마저 고개 숙이게 합니다.

 

  야생화는 마음이 닿아야 곁을 주나 봅니다. 무엇이 못마땅한지 면과 면의 경계에서 돌아누울 기색입니다. 우리 둘 사이에 긴장감이 흐릅니다. 첫사랑에게 연서를 보내는 심정으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얻어 보려고 애씁니다. 기다려도 내 마음에 들어앉지 않아서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빨리 마음 문을 열지 않는 야생화에 원망의 화살을 쏠까 봐 조마조마합니다. 이러다 한 컷도 찍지 못하고 돌아서야 할 것 같아 고해성사하듯 사랑 고백을 해봅니다. 겨우 어르고 달래서 몇 컷 담았습니다. 사랑할 때 한 번에 다 보여주지 않아 애를 태우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하듯이 야생화도 희생 없인 렌즈 안으로 스며들지 않습니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앵글에 담기는 적정거리입니다. 사랑의 거리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종교는 많아도 꽃을 숭배하는 이는 없습니다. 이 순간만이라도 잠시 꽃의 신에게 경배드리려 합니다. 천사를 본 적 없으나 야생화를 닮았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가녀리지만 품이 넉넉합니다. 작가들은 야생화의 도도하고도 냉정해 보이는 여인에게 홀려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얼레지는 아침에는 꽃봉오리가 닫혀 있다가 햇볕이 들어오면 꽃잎이 벌어집니다. 다시 오후가 되면 꽃잎이 뒤로 말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성의 미니스커트가 바람에 살짝 날려 속옷이 보일 듯 말 듯 한 치명적인 매력 같습니다. 변화되는 과정을 담기 위해 작가들은 이른 아침부터 줄지어서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야생화를 담기 위한 작업이 고됩니다. 야생화의 크기가 4센티에서 8센티미터밖에 안 돼서 땅과 한 몸이 되어야 겨우 몇 장의 사진을 얻습니다. 앵글을 맞추느라 최대한 수그렸더니 온몸이 쑤시네요. 신내림 예식이라도 한 듯 몸이 나른합니다. 야생화는 내 마음을 읽었을까요. 보랏빛 손을 내밀어 어깨를 토닥여 줍니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의 문장들이 온몸을 붉게 물들입니다. 매달려 있던 생의 줄을 잠시 풀어놓고 쉼을 합니다.

 

  아침 끼니를 거르고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도시락으로 서로를 토닥입니다. 작가들의 발뒤꿈치에 시선이 갑니다. 순간 열정의 향기가 허기를 면하게 하네요. 짧은 시간의 포개짐, 익명의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얻습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로 바람이 들어옵니다. 야생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잠시 숨통을 틉니다. 순간 잡아두었던 초점이 흔들립니다.

 

  아뿔싸, 지나가던 작가님이 조용히 타이르네요. “비닐을 깔면 꽃이 꺾이니까 옷에 흙이 묻더라도 그냥 찍으세요. 꽃을 소중히 다루어야죠.” 합니다. 엉겁결에 비닐을 치워보니 앞사람들이 찍고 간 발자국이 선명합니다. 가녀린 목덜미가 여기저기 부러져 있습니다. 그 위에 내 몸을 얹힌 죄로 뒤집어썼지만, 지나친 말이 아니라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작가들의 발에 밟히고 이리저리 채여서 몸살을 앓았을 것입니다. 생명 하나 지킬 힘도 없이 세상에 와서 비명횡사했습니다. 아름다움에 취해 감상만 했지, 지켜주지 못해서 시야가 흐려집니다. 생과 사가 한순간이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데 때론 행복해서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짧은 생마저도 타의로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운명이 있듯이 꽃도 이렇듯 지는 길이 다 다릅니다. 잠깐 머물다 간 서러운 생을 어쩌지 못해 심장이 덜컥합니다. 내년을 기약하고 서럽지 않을 정도의 이별을 고해봅니다

 

-2022. 좋은수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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