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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올리는 속건제(贖愆祭)-김근혜

테오리아2 2018. 4. 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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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올리는 속건제(贖愆祭)

 

  김근혜

 

버지는 땅을 팔면서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렸다. 외지인이 와서 공장을 짓는다며 땅값을 비싸게 준다고 했다. 귀가 여린 아버지는 그 꾐에 계약금만 받고 땅문서에 덜컥 도장을 찍었다.

 

쉰을 넘긴 아버지가 맨손으로 일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산을 잃어버린 심정이 오죽했을까. 목숨을 끊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곡기를 입에 대지 않고 벽만 보고 있는 날이 많아졌다. 자다가도 화가 차오르는지 가슴을 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럴 때마다 조바심이 나서 아버지 방을 기웃거렸다.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닥쳐도 흔들리면 안 된다고 밥상머리에서 누누이 강조하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이 다 짐으로만 보인다며 등을 점점 바닥에 누였다.

 

밝은 달도 떠나고 맑은 바람도 불어오지 않는 집은 적요했다. 따뜻한 난로처럼 늘 함께할 것 같았던 아버지 친구들은 등을 돌렸다. 그나마 남은 몇몇 친구도 손이라도 내밀까 봐 거리를 두자 아버지의 상실감은 깊어만 갔다. 또한 떠나가는 친구의 등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아버지의 절망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는 어머니 등이 더 추워 보였다.

 

아버지가 졌던 짐을 할아버지가 대신 지게 되었다. 한약재를 팔기 위해 난전에서 쭈그리고 있는 할아버지를 차마 볼 수 없었던지 아버지는 다시 등을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는 부농의 차남으로 할아버지의 커다란 우산 아래에서 비바람을 모르고 살았다. 풍류나 즐기고 시나 쓰던 당신이었건만 언덕 넘는 법을 익혀야 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대서소에서 일할 수 있었다. 식구들 입에 풀칠도 어려운 급료였으니 짬짬이 막일도 마다치 않으셨다.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앓는 소리를 자식들은 아버지는 다 그러려니 무심히 넘기며 물어오는 먹이를 넙죽넙죽 받아먹고 자랐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의 몸은 나뭇등걸처럼 뒤틀리고 가벼워졌다.

 

아버지를 등에 업을 차례가 되니 병들고 늙었다고 선뜻 나서서 보살펴 드리겠다는 자식이 없다. 서로 모시지 않겠다고 자신의 삶을 변명하기에 바빴다. 아버지는 누구 등에도 기대지 못하는 귀찮고 무거운 짐이었다. 그래도 금방 결혼한 내 형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남편의 의중을 떠보았더니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방이 두 칸뿐이라서 불편한 것이 많았다. 큰아이도 백일을 갓 지나 손길이 많이 필요할 때였다. 형편이라도 넉넉하면 아버지 보살필 사람을 들일 수도 있을 텐데 적은 월급으로는 생활하기조차 버거웠다.

 

갓난아기는 집에 낯선 사람이 들어서 그런지 밤낮이 바뀌고 더 보챘다. 아버지는 한겨울에도 수박과 참외를 찾으셨고 음식도 가리는 것이 많았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 내가 누군지도 몰라봤다. 까다로운 아버지 병시중 들랴, 갓난아기 돌보랴, 몸이 서너 개라도 부족했다. 체력은 떨어지고 잠도 부족해서 몸이 상할 대로 상했다.

 

결국엔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쓰러질 판이었다. 사람 좋은 남편도 이런 상황을 견뎌내느라 힘들어했다. 쪼들리는 살림살이에 병든 장인까지 모시고 살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편은 서너 달이 지나자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다. 홧김에 다 같은 자식인데 왜 나만 이 고생하느냐고 언니에게 한바탕 퍼부었다. 하지만 편안히 잠드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금세 후회가 밀려왔다. 당신이 가장 의지하고 싶은 딸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겨우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아버지를 시골집으로 모셨다. 가시고 이내 돌아가셨다. 대부분 노인이 그러하듯 아버지도 자손들 얼굴 보며 오순도순 살다 가는 마지막 길을 원하셨다. 하지만 사방팔방 둘러봐도 그럴 형편이 못 되니 자식들 짐을 덜어주려고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못된 자식들은 현대판 고려장인 줄 뻔히 알면서도 제 새끼 끌어안고 살기에 바빠 모르는 척했다.

 

아이들이 극구 말리는데도 내 집이 편해서 내려왔다고 하시더라는 동네 분들의 전언을 듣고 부끄러워 차마 낯을 들 수 없었다. 유품을 정리하는데 낡은 공책에 써놓은 메모가 있었다. 미리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몰랐구나. 내 목숨 하나도 어쩌지 못하고 짐이 된 것 같아 미안하다. 엄마 곁으로 먼저 가니 잘 살아라. 너희 사 남매를 키우면서 힘들었던 적도 많았지만 한 번도 짐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너희가 없었다면 사기를 당했을 때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너희는 내 삶의 동력이었다. 너희는 나를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준 행복한 짐이었단다. 너희도 자식을 키워보면 알겠지만 자식은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소중한 힘이다.”

 

눈앞이 뿌예져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살아 계실 때 잘해 드리지 못한 죄책감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힘들어도 끝까지 모셨더라면 이렇게 회한에 울부짖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젠 철이 들어서 잘해드리고 싶은데 애절하게 보고 싶은 아버지로 기억 속에만 머문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스무 번의 해가 바뀌었다. 100세 시대를 맞아 건강하고 활기찬 노인들을 자주 대하게 되니 고희(古稀)도 못 넘기고 가신 아버지 생각이 뼈에 사무친다. 뒤늦게나마 산소에 엎드려 속건제를 올리고 싶지만 그럴 용기조차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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