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시흥문학상 수필부문 수상작>
손톱
허효남
손톱은 그리움이다. 가만히 있어도 스멀히 자라나서 잘라내도 또 자라나는 지독한 그리움이다. 쇠붙이를 들고 톡탁여도 웃자란 그리움들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길 잃은 마음들이 사방천지로 흩뿌려지며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깎을수록 더 단단히 돋아나는 그리움은 기약 없는 시간을 맹세한 채 영원토록 잘라내야 할 형벌을 내린다.
그리움이 지난 것을 불러 내 앞에 붙들어 세운다. 아이의 손톱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주말에 할머니가 봉숭아물을 들여 준 것이라 했다. 돌 위에 여린 잎을 놓고 찧으며 내 손톱을 물들이던 시간들도 있었다. 백반가루를 넣어 곱게 풀린 꽃잎들을 손끝에 올려주던 분도 내 할머니였다. 아이의 할머니도, 내 할머니도 앙증맞은 손을 잡으며 어떤 마음이셨을까. 꽃잎처럼 단아하고 향이 고운 삶으로 피어날 한 자락 염원을 담으셨을 게다. 마치 붉은 축등을 달며 기도를 하듯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꽃잎들을 한 점씩 떠올리셨을 테다.
언젠가는 아이에게 그리움으로 피어날 봉숭아 빛 손톱 끝을 나는 손톱깎이로 잘라주었다. 그리움이 온전한 그리움이기 위해서는 깎이고 잘려진 시간들이 축적되어야만 한다. 깎아주지 않으면 그리워 할 수 없다. 침잠된 세포들이 안으로 고여 들지 않는다면 손톱은 더 이상 자라나지 않는다. 각화되고 퇴적될 또 다른 시간을 위해 비워내는 것, 손톱을 깎는 일은 현재를 잘라내며 그리움의 공간을 넓혀가는 일이다.
초승달로 깎여진 손톱조각들이 실눈을 뜨며 나를 바라본다. 바닥 가득히 어둠이 몰려오자 달은 금기시된 비밀들을 풀어낸다. 손톱에게는 감춰야 할 이야기들이 많다. 혼이 담겼다고 여긴 옛사람들은 손톱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밤에 깎거나 남의 집에서도 다듬지 말라 하여 두려움을 엄포하였다. 뉴질랜드 마오리족 추장의 손톱과 발톱은 묘지에 숨기고, 파타고니아 원주민들은 손톱을 태운다. 심지어 마다가스카르 섬의 베스틸레로족은 ‘라만고’라는 직책자를 두어 왕족의 손톱과 발톱을 먹어 없애게 했다. 타인의 손에 들어가면 원소유자를 해친다는 관념 때문에 손톱은 음지로 살아온 적이 많았다. 세상에 떳떳이 드러나기보다 숨기고 묻혀야 할 삶의 뒷 그늘이 되어갔다.
음지의 숙명처럼 몸의 말단부 가장자리를 차지하고도 손톱은 매일매일 자라난다. 금기에 대한 욕망을 치솟을 듯이 생장을 멈추지 않는다. 싹이 트면 버려져야 할 운명에도 한사코 삐죽이 돋아나는 근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억센 삶에 의지다. 때가 끼고 먼지가 깃든 비루한 생일지라도 한때의 삶마저 찬란하고자 한다. 남몰래 손을 보호하고, 물건을 잡을 받침대 역할을 하는 음덕이 묻히어도 시한부의 삶에 자족할 줄 안다. 손톱을 깎으며 하얗게 자라난 내 시간들을 대면한다. 손톱보다 더 치열하지도, 겸손하지도 않았다. 딱딱하게 자라난 교만과 나태함을 싹둑 잘라낸다. 손톱을 깎는 일은 고르고 다듬어도 또다시 자라나는 내면의 잡풀들을 솎아주는 시간이다.
손톱에는 저마다의 삶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하찮은 손톱을 작은 도화지 삼아 그려낸 저마다의 인생행로가 담겨졌다. 들일을 하던 아버지의 손톱에는 늘 흙이 묻어 있었다. 주름과 굳은살로 뭉툭한 손끝에 두터운 손톱이 강직했다. 늘 바짝 긴장된 손톱은 동만 트면 나갈 듯이 준비된 자세였다. 정비공인 친척 오빠의 손에는 항상 기름이 묻어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기름때가 손톱 가장자리로 검은 테두리를 그려내었다. 손톱 끝에 물든 아치형의 곡선이 오빠가 지켜주는 가정의 지붕처럼 튼튼해 보이었다. 개구쟁이 내 아이의 손톱은 늘 찌꺼기들이 가득하다.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 만지고 들어와 항상 손톱 끝이 새카맣다.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는 손톱에 상상화 같은 꿈이 그려져 있다. 손톱의 색깔이나 윤기, 강도로 건강의 척도를 삼는 것도 그 안에 자신만의 삶의 정보가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밀하게 숨겨진 손톱 끝의 내력을 더듬다 보면 과거를 대면하고 미래를 만나게 된다. 저마다 걸어온 삶의 여정은 달라도 끝점에서는 똑같이 잘려 나가야 하는 생의 동일점도 찾아진다. 손톱을 잘라주며 서로를 보듬는 시간들도 한정된 인생일로의 한 부분일 뿐이다. 매일매일 자라나는 시간들도 언젠가는 무연히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 터이다. 손톱을 깎는 일은 영원하지 않은 삶의 끝자락을 상기하며, 지금이라는 순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잘못 길을 들었는지 내 손톱 끝은 자주 뜯겨져 있다. 손톱을 깨무는 고질적인 습관에 잘못 길들여진 탓이다. 못난 손톱이 뜯겨지기까지 해서 내가 미워 보이는 날이 많았다. 손톱이 마음의 거울이라면 나는 그것을 보기가 두려웠다. 내 안에 똬리를 튼 허기를 대면하면 갈퀴 같은 손톱이 나를 향해 포효해 왔다. 반듯하게 자라나지 못하고 어긋나게 잘린 결핍들이 다시 내 안을 할퀴고 들었다. 심중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어가 기어이 붉은 피로 생채기를 내고서야 그것이 내 삶의 흔적임을 알게 되었다.
늘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한 올 뜯어내어 나는 생의 속도를 앞지르고자 했었다. 섣부른 관념들이 손톱만큼도 견디지 못하며 만용을 부려대었다. 손톱보다 더 딱딱하게 고착화된 습관은 삶의 길목마다 고집을 부려 쉬운 길을 얽혀진 길로 만들었다. 보잘것없는 손톱에게도 생장 주기가 있으며, 살점에서 차오르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길을 늘 둘러만 왔다. 감당할 수 없는 벼랑 끝으로 잘려나가 추락한 것에게도 재생이라는 희망이 있다. 바닥에 닿아서야 새살로 차올라 회생하는 기적이 손톱 안에 깃들어 있다. 자라나고 잘려나가며 또 돋아나고 깎여나가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모습인지 모른다. 오기와 투지를 버리고 이제 마음을 열어서 거울 같은 손톱을 들여다보고 싶다. 내 안으로 날이 선 칼날을 내려놓고, 허위로 부서진 손톱들을 살피고 보듬으며 살아갈 터이다.
손톱을 깎는다. 뜯겨진 내 혼 한 조각은 아직도 방황하고 있다. 바닥으로 흩어진 삶의 파편들을 바라본다. 잘려나간 방향 점들이 어긋난 시간들을 반추하며 마음을 다잡으라 한다.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아 정도를 아는 만큼만 가지런하면 좋겠다. 어두운 밤하늘의 초승달로 떠오른 손톱에게 이제 조심스레 물어보고 싶다, 어슴푸레한 달 아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흔적(痕迹)을 ‘부재의 현존’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실체나 현상이 사라진 자리에 그것의 자국이 남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모습은 처음 형태의 어렴풋한 이미지와 변화의 과정을 짐작케 한다. 사람들이 가진 상흔(傷痕)이나 손때 묻은 물건의 낡은 흔적 속에도 그 주인의 내력과 애환을 엿볼 수 있다.
나의 양복 호주머니에는 다소 큼직한 회갈색의 나무도장 하나가 늘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막도장처럼 두루치기로 사용한 적도 있지만 매끄러운 손 느낌이나 바탕무늬의 결로 보아서 흔한 나무의 재질은 아닌 듯싶다. 귀퉁이가 터진 뚜껑을 열면 테두리 쪽은 거의 닳아 없어졌고 생채기가 난 글자 사이에는 속더께가 피딱지처럼 앉아있다. 낡은 우묵모자를 걸친 홍안(紅顔)의 늙은이 모습같이 추레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도드라진 이름자는 그런대로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갓 만들어졌을 때는 작은 원 안에 비늘처럼 깎인 섬세한 홈과 부드러운 획의 곡선미가 유달리 돋보이는 하나의 조각품이었다. 그 당시에 보기 드문 한글 흘림체로 된 글씨는 둥근 연못에 노니는 어린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생동감이 있었다. 이것은 시골 장터에서 도장포를 하던 아버지가 공들여 비다듬은 나의 중학교 졸업선물이다. 식구들 몫은 도장재료의 자투리로 자주 새겨줄 만도 한데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다소 까탈스러운 편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하나뿐인 유품 대하듯 이 도장을 끔찍이 아낀다.
아버지가 이런 업종으로 생계를 꾸리게 된 것은 곱상한 용모에 재능도 많았지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 탓에 변변한 직업을 가질 엄두도 내지 못한 까닭이었다. 아버지는, 불구의 외로운 소년이 익힌 손재주가 나중에 밥줄이 되었다며 가끔 자조적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친구들이 아버지의 직업보다는 봉충다리 걸음새를 흉볼까 봐 읍내에 가면 도장포를 에돌아 다니곤 했다. 철딱서니 없는 나의 행동거지도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내 나름의 이해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면서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도장 밑감인 돌과 나무의 새김 일은 비바람이나 흐르는 계곡물이 산이나 바위를 깎고 다듬기를 되풀이 하는 자연의 손질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글자판의 조각 작업은 동양적인 전각의 장르에 속하지만 하루벌이 수단이 되다 보니 미술 조각가나 수공예 예술가처럼 귀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아버지의 말 비침은 없었지만 집안의 신뢰와 기대를 이끄는 증표로서 도장을 새겨준 듯하다. 나는 단지 또래들 앞에서 공책에 찍어 보이며 멋모른 채 깝죽대기만 했다. 이것은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특별한 외곬 사랑을 예술혼에 담은, 값어치로 따질 수 없는 장인(匠人)의 작품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해가 갈수록 예스러움이 깊어지고 손에 쥐면 두터운 부정(父情)이 따뜻하게 감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월 따라 도장의 윗부리는 살 빠진 주름처럼 이제 늙바탕티가 흐른다. 대학입학 지원서에 처음으로 사용되었을 때만 해도 새참했던 필체에는 기품과 중후함이 묻어있었다. 신입사원 때, 도장이 서류의 결재 칸을 넘쳐 민망스러웠던 일도 있었지만 내 이름을 잘 기억해주는 잇속 또한 쏠쏠한 편이었다. 혼인신고서의 신성한 핏빛 서약이나, 아파트 구입의 은행대출 때는 믿음직한 나의 분신이었다. 도장은 내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얼굴을 내밀며 내가 거쳐 간 자리에 붉은 흔적을 심어놓곤 했다.
어머니가 유방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날도 그랬다. 젊은 시절, 한두 살 터울의 많은 자식들을 기르느라 혹사한 젖꼭지의 터진 살 틈으로 종양의 멍울이 뿌리를 내렸는지 모른다. 보호자인 나를 잡죄는 담당의사의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도장의 꼭뒤를 눌렀다. 다행히 동의서에 찍힌 빨강색의 큼직한 이름자는 상서로운 기운을 담은 행운의 부적이 된 듯했다. 어머니는 양쪽 유방을 절제하는 힘든 외과수술을 마치고 얼마간의 입원기간을 거쳐 퇴원하였다.
우리 형제들의 젖줄이었던 생명의 샘은 사라져버렸다. 젖먹이 동생들은 빈 젖에 옹알대기 일쑤였지만,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머니의 다른 쪽 젖가슴을 움켜쥔 채 어머니와 눈을 맞추며 정을 따뜻이 데우던 안식처였다. 어슴새벽이면 뒤란에서 어머니의 젖빌기 정성도 여러 해, 그렇게 자식 다섯을 오롯이 키워냈던 신비의 샘터는 허물어져 그 젖무덤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단지 지렁이 같이 검붉은 흔적만 얼기설기 남아 우리들 마음을 아프게 했다.
소중한 것을 잃은 대신 건강한 여생을 누리고 우리 곁을 떠난 어머니의 유골은 먼저 간 아버지 곁을 찾았다. 잦은 병고에 시달리다가 어머니 보다 앞서 죽음을 맞이했던 아버지는 평소에도 화장(火葬)을 해주기를 당부했었다. 그동안 새겨준 수많은 이름과는 달리 당신의 온전치 못한, 불구였던 육신의 흔적을 이승에서 지우고 싶었는지 모른다. 우리가족은, 풍광이 수려하고 도래샘이 흐르는 울창한 숲의 박달나무 군락(群落)에 유골을 묻는, 자연장((自然葬:수목장)을 치렀다. 박달나무는 흔히 튼실한 글씨 새김거리가 되기에 아버지가 탓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도장을 주문받으면 값비싼 동물의 뿔이나 돌 종류 보다는 목도장을 먼저 권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회양목, 돌배나무, 대추나무, 먹감나무의 속살을 빚을 때, 손끝에 퍼지는 나무 향기를 무척 좋아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배인 이들의 갖가지 흔적은 비 온 뒤의 흙냄새 같은, 평소 아버지의 채취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유골은 엇가지를 걸친 채 서로 의지하고 있는 아버지의 이웃나무 발치에 뉘어드렸다.
부모님의 수목은 뼈마디 같은 앙상한 가지 새새에 풍성한 잎사귀를 늘리고 있어 늘품 있는 모양새로 변해간다. 우리 부모님께 특별했던, 인내와 희생과 사랑의 유전자는 인간이나 식물계 모두의 혈관 속에 생기를 북돋우는 삶의 근원적인 힘인 것 같다. 드맑은 그곳의 숲을 찾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물 오른 나뭇가지 사이로 부모님의 흔적이 살아 숨 쉬듯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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