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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좋은수필]??벚나무에게? / 성냑향

테오리아2 2014. 8. 16.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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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에게 / 성냑향

 

 

너를 처음 만난 날은 아무래도 기억을 못하겠어. 정말 오래전일 테지. 늘 곁에 있었던 건 알아.

미안한 고백이지만 너의 존재가 내 마음에 선명하게 도장 찍힌 건 이십세기 마지막 해의 봄에 이르러서야. 그 봄의 어느 하루, 로사복지관 박 선생님과 미용반 언니 둘이 황령산 언저리 상록수들 사이에 분홍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던 너를 내게 데려다주었어. 그 때 뜻을 잘 모르던 단어의 의미가 문득 분명해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무렵만 해도 산에서 잘 내려오지 않던 너였으나, 어느새 도시의 노변은 너의 분신들로 가득하다. 온천천과 남천동 길, 승학사 아래 돌산 길…. 발길 돌리는 곳마다 너는 뛰어오고, 나를 막아서고, 나는 도무지 피할 수 없이 너를 만나고 만다.

너는 네가 정한 약속, 행위를 어기는 법이 없었다. 지독하리만큼의 철저함. 때론 그 점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는 걸 넌 알까? 4월, 대기의 찬 기운이 가시기 바쁘게 꽃망울을 터트리는 너를 보면 난 늘 궁금했어. 왜 매번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건지. 헐벗은 몸으로 겨울을 나느라 피폐해진 몸에 양분을 공급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잎을 매달아야 하는 거잖니? 가지마다 푸른 링거병 주렁주렁 내걸어야 맞는데. 네 앙상한 졸기리들에 무작정 피어난 꽃들을 보면 나는 아름다움보다는 처연함을 느끼고 말았어. 화사한 꽃송이를 붙잡고 있는 꽃받침들은 어쩌면 모두 네 슬픔의 조각을 하나씩 쥐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마른 몸 비틀어 짜내 만든 꽃들 그 한 송이. 한 송이가 너의 알 수 없는 집착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강박적일 만큼 꽃에 집착하는 너. 개화의 욕망에 중독된 너.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새끼손가락 끝까지 꽃을 피우고 말더구나. 독한 것. 그리고 마침내 무수한 꽃들로 폭발해버리는 너.

그런 너를 이해하려고 애써보지만 너는 결코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저 너를, 늘 그렇듯 무릎 모으고 앉아 짐작해 볼뿐.

기금 여기는 운문사 부근. 막걸리와 파전을 파는 매점의 마당이다. 너른 마당 곳곳에서 한창 백분홍 꽃을 피우고 있는 네게 이끌려 들어온 거란다. 산골이라 날이 더디 풀린 탓이겠지. 해서, 내 고향에서는 다 져버린 너의 꽃을 또 한 번 만나게 되었다. 마당 한가운데 버티고 선 너의 둥치는 도시에서 본 그 어느 것보다 굵구나. 해를 그러쥐기라도 할 듯 길게, 길게 뻗은 너의 실한 가지 하나는 혼신을 다하는 무용수의 팔처럼 선이 아름답다. 마당의 평상에 앉아 머리 위의 가지를 함께 바라보면 어르신은 네 연륜을 삼백 년으로 추정하신다.

언제부턴가, 네 몸에 매단 꽃송이들이 너만의 언어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었다. 긴 여울 동안 속에서 차오른 사유를, 표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너의 내면을 너만의 글자로 네 몸 가득 문신한 게 아닌가 추측했었어. 봄날, 네가 그토록 간절히 써놓은 게 한 편의 시인지, 한 권의 자서전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면 누군가에게 보내는 단 한 문장의 엽서일지도.

어쨌거나 쓰고 나면 너는 그걸 찢어버리지. 혼신을 다해 쓴 글자를 마치 진저리라도 치듯 찢어발긴다. 간밤에 쓴 뜨거운 연서처럼 없애버린다. 동백처럼 한 페이지의 뚝뚝 뜯어내지 않는다. 목련처럼 망설이다 맥없이 떨구지도 않더구나. 네 싱싱하고 보드라운 글자들은 모든 자음과 모음들이 조각조각 파쇄되어 바람에 날려갔어. 너의 몸에서 분리된 글자들은 더 이산 꽃이 아니었다. 난민들처럼 도로 위로 우왕좌왕 몰려다니다 자동차의 바퀴에, 사람들의 발에 짓이겨지고 말았지. 그 모두를 지켜보면서도 비정할 만큼 차분하게 서 있는 너에게 화가 치밀었어. 너는 말하고 싶었겠지. 세상의 모든 꽃들은 때가 되면 태어난 자리에서 멀어지는 법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알고 싶어. 너로 하여금 온몸의 정서를 빼내 꽃을 피우게 하고, 열렬히 발화(發話)하게 하는 존재가 누군지. 봄이면 봄마다 혈서를 써 바치는 그 대상이 누군지. 그리고 늘 그렇듯 끝내 네 꽃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그가 누군지…. 미치도록 궁금해.

그러나 너는 역시 오늘도 침묵을 택하는군. 슬쩍 장난을 치듯 내 머리 위로 꽃잎들을 떨구는데….

네가 버린 글자들이 막걸리 술잔 속에 후두둑 떨어진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파전 위에 알 수 없는 분홍색의 기호가 씌어진다. 올해 팔순의 어르신은 그것들을 말없이 받아 자신다. 이 어르신이야말로 너의 문자를 제대로 읽으시는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든다. 나도 한 잎 털어 넣고서 네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어른에게 진지하게 여쭤볼 참이다.

너에게 소리를 한 자락 바치고 싶은 봄이다. 내게 재대로 된 소리를 바치고 싶어 다음 생애는 명창으로 태어나고 싶은 봄이다.

오직 너 하나뿐인 조용한 봄이다.

운문사 부근의 꽃그늘이다.

오래된 시집 아래다.

출처 : 신현식의 수필세상
글쓴이 : 에세이 자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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