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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좋은수필]그물 / 이순금

테오리아2 2014. 8. 16.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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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 / 이순금

 

 

 

석류나무 가지 사이에 쌀알만 한 몸집의 거미 한 마리가 어느 새 집을 지었다. 화이트 팬으로 열십자를 그은 것 같은 모양이다. 중심에는 거미가 내 발을 하얀 줄에 대고 꼼짝 않고 엎드려 있다. 자기 다리가 그리 긴 것처럼 위장을 한 모습이다.

정면에서 아무리 봐도 거미줄이 안 보인다. 카메라로 찍어보아도 열십자만 나온다. 거미가 요술이라도 부렸나 싶어 각도를 바꿔가면서 살펴봐도 거미줄이 없다. 할 수 없이 까만 종이를 뒤쪽으로 받치고 살펴보니 그때야 거미줄의 형체가 잡힌다. 보이지 않는 고운 실로 촘촘히도 엮어 놓았다.

거미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능력이 약하다 싶으면 달리 방법을 찾아내나 보다. 인간들도 자기를 좀 더 돋보이려 치장을 한다. 좋은 옷을 입고 멋진 구두를 신으면 조금 더 근사하게 보일 수도 있다. 거미도 그의 존재를 알리려고 모든 재주를 둥원한다. 자기의 영역이라고 열십자로 표시해 좋았다. 그건 모든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신고이며 경고이기도 하다.

만약에 작은 거미가 그의 그물을 허공에 꽉 차게 쳐 놓을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위에도 배가 다니는 항구에도 저 거미의 촘촘하고 견고한 그물이 있다면, 거미는 막강한 힘을 얻고 사람은 거미를 두려워할 것이다. 석류나무 가지 속에 숨어서 보이지도 않는 집을 짓던 얘기는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사람과 싸워야 하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발이 긴 거미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거미줄에 온종일 한두 마리의 먹이만 걸리면 만족하는 것 같다. 온 신경을 거미줄에 대 놓고 일념으로 먹이를 기다린다. 작은 거미집에 한꺼번에 열 마리의 먹이가 달라붙었다고 생각해 보자. 거미는 사냥도 못 하고 집은 다 부서져 버릴 것이다. 내 그릇의 크기를 먼저 살펴야 하지 않을까.

과욕을 버리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 스스로 바라는 바를 줄이면 어떨까. 작은 몸에 맞게 작은 그물 집을 짓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거미처럼 내 마음의 분수를 지키면 세상이 좀 더 질서가 있고 안정이 되지 않을까.

작은 거미집에 꿀벌이 하나 걸려들었다. 잡자기 받은 큰 선물이라서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한참을 실랑이한 뒤 거미줄로 대강 묶어서 매달아 놓고는 구멍이 뜷린 집을 고치느라 분주하다. 부지런하고 욕심이 없으니 조바심하지 않는다. 사람처럼 먹고 남아서 무턱대고 쌓아 놓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벌려 놓은 능력 안에서 하루하루 의미를 찾는다.

세상에는 많은 동류의 그물이 있다. 그물이란 상대를 구속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상대를 보호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저마다의 그물을 가지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먹이를 위해 어느 곳에든 펼쳐놓고 있다. 시장에도 빌딩 숲에도 가는 곳마다 누군가의 그물이 있다.

하늘에는 인드라망이라는 그물이 있다. 도리천 하늘을 닮은 그물인데 그물의 매듭마다 수정 구슬이 달려 있다. 그 구슬마다 모든 세계가 다 비추인다고 한다. 세상의 물질이나 생명이 다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석류나무 사이의 작은 거미집에도 한로(寒露)가 지나면 영롱한 이슬이 맻힐 것이다. 하늘의 인드라망처럼 유리구슬이 송송 매달리면 그 속에 또 다른 모습들이 분명 들어가서 비치게 될 것이다.

석류나무 사이에 십자문 그물을 친 작은 거미는 느긋하게 집을 다 고쳐놓고 숨을 고르고 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잡고 잡히는 어쩔 수 없는 일을 기다리며 팔과 다리를 최대한 길어 보이게 걸쳐 놓고 또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어부가 던지는 그물엔 물고기가 잡힌다. 살기 위한 수단이다. 무엇을 막아내기 위해 치는 그물도 있고 무엇을 얻기 위해 치는 그물도 있다. 알게 모르게 사용하는 내 그물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어떨까.

오늘도 아침부터 분주하다. 늘 내가 엮어놓은 그물을 관리하고 살피느라 하루가 쏜살처럼 지나간다. 친구를 만나고, 물건을 주고받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하루라는 작은 실오라기 하나가 모여서 일생이라는 큰 그물 집을 짓고 있다. 작은 거미가 몇 시간이면 너끈히 하는 일을 나는 평생을 해도 쩔쩔맨다. 거미줄이 찢어져 너덜거려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치선을 다해 수리하는 저 작은 거미에게서 배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내 그물들을 저 작은 거미의 보이지 않는 집처럼 투명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아니, 모두가 안드라의 그물에 그렇게 비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출처 : 신현식의 수필세상
글쓴이 : 에세이 자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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