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서울 암사동 유적 세계유산 등재기원 문학작품 수필부문 당선작]
아난의 풋잠
정 정 성
내가 사는 마을은 암사동 선사주거지에 잇닿아 있다. 지금은 ‘서원마을’이라 부르지만 오랫동안 ‘점마을’로 불렸다. 아득한 선사시대 사람들이 토기에 빗살무늬를 바치고, 수렵과 사냥으로 삶을 이어 온 전형적인 강마을이다.
서른 세 해 전 가을, 우리 가족은 이곳에 터를 잡았다. 강원도 두메산골 태생인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의 좁은 아파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새로운 삶터를 찾아 변두리를 전전하다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도착한 곳이 점마을이었다.
개발제한구역의 좁다란 비포장도로를 따라 십여 분 남짓 걸어서 도착한 곳. 고덕산 자락이 팔베개로 마을을 감싼 아래 쉰 여 채의 집들이 다정하게 모여 있었다. 나지막한 집들, 갖가지 꽃들이 아기자기 피어 있는 너른 마당. 가장자리로는 감나무 대추나무 같은 유실수가 심어져 있었다. 바지랑대를 돋아 풀 먹인 이불호청이 널린 빨랫줄, 애호박을 썰어 채반에 말리던 초가을 풍경이 단박에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많은 빚을 지고 마련한 새 터전에서 우리 가족은 혹독한 근검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마음이 자주 흐려지던 그 시절, 길 건너 선사주거지가 있다는 건 내게 큰 위안이었다.
틈틈이 선사주거지로 발길을 옮겼다. 느린 걸음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서서히 마음의 그늘이 걷히곤 했다. 마치 육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선사시대의 한순간에 머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다 간 옛 사람들. 청정한 대자연 속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았을 그들을 생각하면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늘 가벼웠다.
장맛비가 그치고 햇볕이 쨍한 오후, 다시 선사주거지로 향한다. 넓은 그늘을 드리운 상수리나무 잎은 변함없이 짙푸르다. ‘뙤약볕을 놓치지 마.’ 어느새 오랜 친구가 된 상수리나무에게 말을 건다. 삼복복더위가 지나면 이내 햇볕이 야윈다. 빛의 각도도 비스듬해진다. 불볕을 감내하겠다며 입술을 앙다무는 상수리나무의 속마음을 읽는다. 그런 매운 다짐을 거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수천 년을 버틴, 탄화된 도토리의 존재를 우리 앞에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움집 앞에서는 늘 생각이 깊어진다. 갈대로 이엉을 엮어 만든 집. 밥을 짓고 잠을 자고 그물을 깁던 둥그런 단칸방. 집은 불편할수록 좋다는 어느 건축가의 말을 떠올린다. 그렇다. 이 둥근 방에서는 어떤 슬픔도 감추기 어려웠으리라.
그 옛날에도 사랑은 애절하였을 터. 여드름이 숭얼숭얼 돋은 소년은 이웃집 소녀의 마음을 얻지 못해 고기잡이도 활쏘기도 심드렁했을 것이다. 저물녘까지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고도 잠 못 들며 뒤척이는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자식을 모닥불 앞에 일으켜 앉히고 등을 토닥거렸을 둥근 방. 아득한 그날 저녁의 온기가 그리워 오래 움집 앞에 머물게 되는 건 아닐까.
오늘날 대부분의 방들은 네모난 방으로 변했다. 안으로 잠금 장치가 달린 문. 그렇게 굳게 잠긴 방은 소통을 거부하고 단절한다. 때문에 현실은 집 안에 빈방을 놔두고도 길거리의 방들이 늘어만 간다. PC방, 전화방, 대화방……. 또 다른 닫힌 공간에서 마음을 받아줄 익명의 대상을 찾는 이들. 가족이 보듬지 못하고 이웃이 외면하는 이들의 방황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면 발걸음은 더욱 느려진다. 투박하기 그지없는 빗살무늬토기의 파편들. 햇살 따사로웠던 날, 토기를 빚어 무늬를 새기며 아득한 옛 사람들은 어떤 생각에 잠기곤 했을까. 민무늬에 덧무늬를 바친 심사는 또 무얼까. 곡식을 늠그느라 갈돌과 갈판은 모서리가 둥글게 닳았다. 몇 대를 물려 썼음직하다.
나무와 돌, 흙으로 만들어진 살림 도구들은 그 쓰임이 다하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다시 자연의 일부가 된다. 반면 비닐과 플라스틱으로 대량 생산되는 오늘날의 살림 도구들은 끝내 자연과 화해하지 못한다. 자연을 병들게 하고, 자연에 깃든 수많은 생명체의 삶을 위협한다. 빗살무늬토기 한 조각을 이토록 소중히 간직하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제 2 전시관에는 속마음을 터놓는 십년지기가 있다. 그와 만난 건 새 천년이 열리던 해 정월이었다. 처음 그와 마주한 순간, 나는 한동안 꼼짝없이 서 있었다. 선사시대의 장례 풍습을 재현하느라 몸에 자갈돌을 얹은 채 누워 있는 그. 이상하게도 그는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조형물이 아닌, 잠시 풋잠에 든 내 피붙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난’, 내가 그에게 지어 준 이름이다.
‘아난, 첫눈이 와요.’ ‘매화가 피었어요.’ ‘뻐꾸기가 돌아왔어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철따라 바깥세상 이야기를 그에게 전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자주 그를 만나러 간 것이 내 뜻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가 불러낸 것이 아닐까. 나를 불러 침묵의 언어로 전하려는 그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에서야 비로소 아난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바로 생명의 소중함이다. 생명체의 삶은 유한하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생명은 영속성을 지닌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 구석기시대로 추정한다. 척박하고 열악한 생존 환경을 극복하며 인간의 생명은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져 나갈 것이다. 생명은 그 어떤 이유로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며, 헤치는 일은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풋잠에 든 아난이 일러주는 것 같다.
서구식 산업문명은 물질적인 풍요와 편리함을 제공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류사회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지는 못한다. 가족은 쉽게 해체되고, 생존을 위해서 사람들은 점점 그악스러워진다. 자연환경도 빠르게 오염되고 있다. 이해와 포용이 절실 한데 세상은 점점 메말라 간다.
이럴 때,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미래는 오랜 옛 지혜 속에 있다’는 진리를 터득하는 공간. 공간은 사람의 숨결과 만났을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생명이 충만한 공간은 이야기를 품고, 이야기는 다시 역사로 남을 것이다. 오래도록 간직될 찬란한 역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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