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생각] 오늘 방영된 광복절특집 이육사 일대기 "절정" 을 보고~| ▣ 자유게시판 2011.08.15.
오늘 MBC T.V 이육사 일대기 "절정"을 보면서~
먼저 MBC와 작가/황진영님, 배우/김동완님,이승효님,서현진님 외 출연진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66주년 광복절을 맞아 ~
이육사의 곧은정신과 가슴아픈 일대기가 방영되는 동시에 선생의 시와 산문들이 방송장면 곳곳에 방송되어 광복절을 기념하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복절 이라 더욱 마음에 와닿는 특집이었다,
"김동완" 의 연기력을 통해 독립 운동가의 마음이 전해젔다, 이런 독립운동가 들이 있었기에 이나라가 이정도라도 존속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선현들께 온마음을 다해 감사드린다, 최고의 장면으로 백마를타고 달리는 마즈막 장면에서 이육사의 詩 광야가 흐르면서 육사의 생애와 그 정신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갈무리 장면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방송에서 소개하지 못한 우리 본향의 자랑인 이 원록(이육사) 선생의 자세한 자료를
안동사람들 회원님들께 소개 하고자 합니다,
이육사의 생애 - 이육사 문학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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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가 태어난 날은 1904년 5월18일(음력4월4일)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는 힘든 역사 가운데 어린시절을 보낸다. |
![]() 육사의 수필 [계절의 오행]에 나오는 왕모산이 멀리 보인다. |
2. 이름
그의 호적등본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고 자(字)는 태경(台卿)이며, 어릴 때 이름이 원삼(源三)이었다. 만 18세가 되던 1922년, 영천 백학학원에 다닐 때도 원삼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고 동기생 정연활이 증언했다.
1926년 중국 중산대학 동창생 명부에 '이활(李活)'로 기록되어있다. 1927년 가을부터 1929년 5월까지 옥고를 치른 뒤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도 '이활'을 사용했다.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첫시 {말}이 '이활'이란 이름으로 게재되었다.
1930년 그의 글에서 처음 사용된다. 1년 7개월 동안 그는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린 죄수였다. 264는 수인의 번호였다.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는 뜻과 식민지 세상을 비웃는 그의 마음, 일제 식민지에서 영원한 죄인이라는 자조섞인 웃음이 담긴 이름이 아닐까.
1932년 의열단(義烈團)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제1기생 입학 명단에 육사(陸史)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죽일 육(戮) , 역사 사(史) 육사(戮史)라는 이름을, 바로 이어서 고기 육(肉) 설사할 사(瀉)를 사용했다.
집안 아저씨인 이영우가 " 육사(戮史)는 역사를 죽인다는 표현이니,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 아닌가? 의미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차라리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표현이 되는 '陸史'를 쓰는게 좋겠다"고 권했다. 陸 (높고 평평한산의 꼭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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