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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육사 일대기

테오리아2 2014. 12. 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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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생각] 오늘 방영된 광복절특집 이육사 일대기 "절정" 을 보고~| ▣ 자유게시판  2011.08.15.

 

오늘 MBC T.V 이육사 일대기 "절정"을 보면서~

 

먼저 MBC와 작가/황진영님, 배우/김동완님,이승효님,서현진님 외 출연진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66주년 광복절을 맞아 ~

이육사의 곧은정신과 가슴아픈 일대기가 방영되는 동시에 선생의 시와 산문들이 방송장면 곳곳에  방송되어 광복절을 기념하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복절 이라 더욱 마음에 와닿는 특집이었다,

"김동완" 의 연기력을 통해 독립 운동가의 마음이 전해젔다, 이런 독립운동가 들이 있었기에 이나라가 이정도라도 존속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선현들께 온마음을 다해 감사드린다, 최고의 장면으로 백마를타고 달리는 마즈막 장면에서 이육사의 詩 광야가 흐르면서 육사의 생애와 그 정신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갈무리 장면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방송에서 소개하지 못한 우리 본향의 자랑인 이 원록(이육사) 선생의 자세한 자료를

안동사람들 회원님들께 소개 하고자 합니다,

 

이육사의 생애 - 이육사 문학관에서 

 

육사가 태어난 날은 1904년 5월18일(음력4월4일)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는 힘든 역사 가운데 어린시절을 보낸다.


육사의 수필 [계절의 오행]에 나오는 왕모산이 멀리 보인다.

1. 출생과 고향

  

육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육사는 수필 [계절(季節)의 오행(五行)]에서 " 내 동리(洞里) 동편에 왕모산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만 대개 우리 동리(洞里)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 뜨는 것"이라고 고향을 이야기한다.  육사가 살던 시절에 이 마을은 백여호가 살아가는 규모였던 모양이다.


육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원촌리 - 오른쪽에 낙동강이 보인다
지금 이 원촌리에 이육사문학관이 건립되었다.

 

육사가 태어난 날은 1904년 5월18일(음력4월4일)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는 힘든 역사 가운데 어린시절을 보낸다.


육사의 수필 [계절의 오행]에 나오는 왕모산이 멀리 보인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선생의 14대 손이다.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 안동이요.

가장 많은 독립유공포상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며,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다.

이렇나 강직한 저항성이 퇴계 학통에서 나왔는데 , 그가 곧 퇴계의 후손이다.

그의 문학적 기질도 역시 퇴계학통의 연장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문학관 가는 길목의 퇴계 종택

 

육사의 집안은 저항성이 강한 성격을 보였다.

이곳 원촌은 하계와 함께 항일 투쟁사에 우뚝 선 마을이다.

하계 출신 예안 의병장 이만도는 일제강점에 단식으로 순국 항거한다.

"친일적인 행위나 태도를 인정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고와 생활자세가 돌연변이로 어느날 갑작스럽게 만들어지기 힘든 일이다. 정신적 틀, 전통적 규범이 육사를 길렀다"라고 김희곤 교수는 쓰고 있다.

 

맏형인 원기는 대구로 이사 후 부모를 모시고 동생을 거느리며 어려운 살림을 도맡았다.

그는 끊임없이 일을 펼치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가난하고 힘든시절이었다. 육사의 형제들은 우애가 대단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한다.


육사의 여섯형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원촌리 집 -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사라지고 없다
그 집터 자리에 청포도 시비가 쓸쓸히 추모객을 맞고 있다.

 

마을 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다.

육사는 어린시절 동리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보면서 흰 돗단배에 대한 시상(詩想)을 키웠으리라.

지금도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강가로 가서 둑길을 걸으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느껴져 온다.

 

 2. 이름

 

 

그의 호적등본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고 자(字)는 태경(台卿)이며, 어릴 때 이름이 원삼(源三)이었다.

만 18세가 되던 1922년, 영천 백학학원에 다닐 때도 원삼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고 동기생 정연활이 증언했다.

 

 

1926년 중국 중산대학 동창생 명부에 '이활(李活)'로 기록되어있다.

1927년 가을부터 1929년 5월까지 옥고를 치른 뒤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도 '이활'을 사용했다.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첫시 {말}이 '이활'이란 이름으로 게재되었다.

 

 

1930년 그의 글에서 처음 사용된다. 1년 7개월 동안 그는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린 죄수였다.

 264는 수인의 번호였다.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는 뜻과 식민지 세상을 비웃는 그의 마음,

일제 식민지에서 영원한 죄인이라는 자조섞인 웃음이 담긴 이름이 아닐까.

 

 

1932년 의열단(義烈團)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제1기생 입학 명단에 육사(陸史)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죽일 육(戮) , 역사 사(史) 육사(戮史)라는 이름을, 바로 이어서 고기 육(肉) 설사할 사(瀉)를 사용했다.

집안 아저씨인 이영우가  " 육사(戮史)는 역사를 죽인다는 표현이니,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 아닌가?

의미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차라리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표현이 되는 '陸史'를 쓰는게 좋겠다"고 권했다.

陸 (높고 평평한산의 꼭대기)

 

 

 

 

 

 

  

 

 1935년 6월 이후 거의 대부분 '이육사(李陸史)'가 사용되었다.

육사의 친필 사인 ->

3. 받은 교육

 

 

육사는 어릴 때 고향에서 조부로부터 형제들과 더불어 한학을 배웠다. [연인기]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웠다고 적었다.

그리고 육사와 같이 한문 공부를 했던 옆집 친척이자 동기가 이에 대하여 "육사가 사서(四書)를 모두 마쳤다"고 증언하였다.

 

 

도산보통공립학교는 진성이씨 집안에서 1909년 설립한 문중학교인 보문의숙(寶文義塾)이

인가를 받은 신학문을 가르치는 공립학교이다.

육사는 이 학교의 1회 졸업생이 된다. 육사의 나이 16세가 되는 때이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대구로 이사를 한다.

1930년대 초의 경찰기록에는 그의 가족들이 모두 대구부 남산정 662번지에 살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서화가로 이름 높던 석재 서병오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그는 시집 간행을 준비하면서 직접 책 표지 제목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백학학원은 경북 영천에서 백학서원에 설립된 신학문 교육학원으로 초등과정과 중등과정이 있었다.

육사의 처가는 영천이었으며 장인이 백학학원의 학무위원이었다.

육사는 백학학원에서 중등과정을 마친 후 9개월간 교원으로 근무를 한다

 

 

1924년 4월 일본 도쿄에 도착하고 1925년 1월 귀국했다.

그가 일본에서 유학한 기간은 9개월정도 되는 셈이다.

각종 기록에서 그의 짧은 일본 체류는 대부분 건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경찰기록 - 토교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뽄(日本)대학전문부,

검찰신문조서 -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 1년간 재학

 

 

독립운동가이면서 육사연구가인 김희곤 교수는 [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지영사,2000)에서 중국현장을 직접 답사 후 쓴 글에서 "1926년부터 1927년 사이 광뚱성 광저우에 있는 쭝산대학(中山大學)을 다닌 '한국생 이활' 이 이육사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힘들다"라고 밝히고 있다. 1926년 쭝산대학(中山)에서 그의 전공과 학년은 '의1(醫一)'로 기록되어있다.

 

1932년에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단체인 의열단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에 이육사가 제1기생 26명 가운데 한 명으로 입교하게 되는데,

"이것은 사전에 의열단과의 관계없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라고 김희곤 교수는 말한다.

 

 4. 시세계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여선 지고
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잃어진 고향

제비야
너도 고향(故鄕)이 있느냐
그래도 강남(江南)을 간다니
저노픈 재우에 힌 구름 한쪼각

제깃에 무드면
두날개가 촉촉이 젓겠구나

가다가 푸른숲우를 지나거든
홧홧한 네 가슴을 식혀나가렴

불행(不幸)이 사막(沙漠)에 떠러져 타죽어도
아이서려야 않겠지

그야 한떼 나라도 홀로 높고 빨라
어느때나 외로운 넋이였거니

그곳에 푸른하늘이 열리면
엇저면 네새고장도 될법하이.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십이성좌(十二星座)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꼭 한 개의 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우리들과 아-주 친(親)하고 그 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아름다운 미래(未來)를 꾸며 볼 동방(東方)의 큰 별을 가지자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地球)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地球)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 보자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軍需夜業)의 젊은 동무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沙漠)의 행상대(行商隊)도 마음을 축여라
화전(火田)에 돌을 줍는 백성(百姓)들도 옥야천리(沃野里)를 차지하자

다 같이 제멋에 알맞는 풍양(豊穰)한 지구(地球)의 주재자(主宰者)로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

한 개의 별 한 개의 지구(地球) 단단히 다져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生産)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 보자
영속(▩粟)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찬연(餐宴)엔
예의에 끄림없는 반취(半醉)의 노래라도 불러 보자

염리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神)이란 항상 거룩합시니
새 별을 찾아가는 이민들의 그 틈엔 안 끼여 갈 테니
새로운 지구(地球)엔 단죄(罪) 없는 노래를 진주(眞珠)처럼 흩이자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의 십이성좌(十二星座) 모든 별을 노래하자

<출전 - 『風林』(1936.12)>

 

5. 기념물


5월의 원촌리 청포도 시비

문학관내 복원된 이육사 생가
                             위 자료는

                         
- 이육사문학관에서 정리했습니다!~ <진성이씨 후손들 카페>

 

 

 

 

출처 : 흰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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