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금성대군의 血石을 神體로 두레골 서낭당 - 해마다 소 잡아 제사, 음복 잔치는 화합협동의 대축제 - ○ 위치·모습 소백산 국망봉 동쪽기슭, 외진 산마을 두레골은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단산면 단곡리다. 서낭당은 두채로 되어 있는데 산신을 위하는 산신당과 금성대군을 받드는 上堂이다. 석축 위에 동남으로 자리한 상당은 맞배지붕의 단칸 기와집으로 3평쯤의 마루방이며, 뒷벽쪽 중앙에 약 50~60㎝높이의 돌을 신체(神體)로 모시고 있는데, 금성대군을 신위로 받든다. 상당 동편 옆에 비슷한 규모의 당집이 서남향으로 자리해 있으니 산신당으로 산신지위(山神之位)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낭당 아래 어구에는 방 한 칸 부엌 한칸 짜리 주사(廚舍)가 있다. ○ 유래 이 자리의 산신당은 오랜 옛날부터 있어 왔고 금성대군을 위하는 상당은 구한말 고종43년(1906)에 설치되었다. 그 유래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 확실한 연대는 상고하지 못했으나 조선 후기 어느 때 순흥고을에 사는 이선달이란 이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가 흘린 피 묻은 돌이 죽동냇물에 있으니, 거두어 달라.」고 당부하면서 그 돌의 모양도 일러 주었다. 예사로운 꿈이 아닌 줄 여겨 이선달은 이튿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죽동 냇물 (순흥읍내에서 동남쪽 약10리 죽계하류)을 뒤졌던 바, 과연 그 돌이 있었다. 이를 가까운 죽동 서낭당에 안치하고, 동네에서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냈으며 그로부터 순흥고을의 관민이 성력을 함께 하여 해마다 정월 보름날 소를 잡아 제사를 올렸다. 이곳 순흥에서 대의를 위하여 큰일을 도모하다가 많은 이 고을사람들과 함께 장렬히 목숨을 바친 금성대군은 이곳 순흥사람들이 가장 숭모하는 영원한 우상이며 의앙의 대상이기에.. 구한말에 이르러 나라를 강도질하려는 왜적의 발악에 항거하여, 국내 곳곳에서 애국의사들이 「토적구곡」의 깃발을 들어 일어설 때 이곳 순흥에서도 의병을 일으켜 겨루었다. 그때 의병을 진압한다. 하여 관군과 함께 왜군들이 순흥에 들어와 설쳤는데 죽동 서낭당 앞에 침을 뱉고 배설을 하는 등 왜군들의 무엄한 짓거리에 인심이 몹시 수런거리는 판에, 마을엔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인심을 더욱 불안케 하였다. 이 무렵 어느 주민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죽동 서낭당에 안치된 돌을 좀더 조용하고 정결한 자리로 옮기도록 일렀다. 이래서 금성대군의 혈석은 소백산 대밑 두레골에 옮겨 모셔진 것인데, 그 일을 주관한데가 이곳 상민(常民) 자치기군인 초군청이었다. 본래 금성대군을 받드는 죽동 서낭제사를 이곳 양반들이 주관해 왔었는데 행사에 범절이 불결하여 신령히 흠향을 않고 제관들에게 재앙이 미치곤 하므로 이 무렵엔 상민의 조직인 초군청에로 이관 되었다고 전한다. 고종43년(1906) 두레골에 혈석을 이안할새, 초군청에서는 모연문(募緣文)을 만들어 널리 성금을 거두었는데 그 모연문 원본이 지금도 순흥초군청 좌상(座上)에게 보존되고 있다. 그런데 그 모연문에는 금성대군 이야기는 전혀없고 산신을 위한다는 사연만이 보인다. 발기인 대표격인 도화주(都化主)는 신두영, 임상우, 임문화로 적혀 있으며 작청, 장청, 추소, 서역소, 사령청, 관노청 등 순흥고을의 하급 관청들에게 상당한 성금을 바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로부터 두레골 서낭제사는 비봉산 본당 제사와 함께 순흥초군청에서 주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제사차림과 의식은 구한말에서 왜정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년세월에 조금도 달라짐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 ○ 고사 두레골 서낭당 제사는 비봉산 본당 제관들이 그대로 맡는다. - 제물로 받쳐지는 소 - 정월 보름날 첫 새벽에 지내는 두레골 서낭제사에는 예로부터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친다. 제사를 며칠 앞두고 가까운 풍기장이나 영주장에서 소를 구하는데 그 제물소에 대한 대접이 자뭇 극진하다. 소를 사러 장으로 가면서 「양반님을 모시러 간다.」고 한다. 소는 생김이 방정하고 살이 쪄야 한다. 일단 마땅한 소를 고르면 값을 깍는 법은 없다. 값을 치르고는 그 자리에서 「謹封」이라 쓴 큰 종이를 소에게 쒸우고 소 앞에 엎드려 절을 한다. 소를 몰고 돌아올 때에도 공경은 극진하다. 갈림길에서 소가 딴 길로 들려하면 「이 쪽 길로 가십시다.」걸음이 느리면 「조금 빨리 가십시다」라고 깍듯이 공대말을 바친다. 만일 중도에서 소가 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소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가기를 빈다. 소는 바로 두레골로 모셔져 며칠동안 호강을 누린다. 제관은 소에게 아침 저녁 문안 절을 올리며 제사에 쓸 기름을 짠 참깨묵을 콩에 섞어 끓여서 끼니마다 소에게 바친다. ○ 제의(祭儀) 정월 13일 낮에 비봉산 「본당」고사를 올린 제관들은 그날 오후에 두레골로 간다. 두레골 어구에서 냇물에 목욕을 한다. 이튿날 조반 후에 소를 잡는 한편, 제관들은 己時 (오전 10시쯤)에 산신당에 「새앙」을 올린다. (새앙이란 아주 작은 밥솥이다. 밥을 지어 솥째로 바친다.) 「4새앙」이라 하여 제관이 차례대로 네 새앙을 올린다(산신에만 올림) 소를 잡아서는 먼저 골, 지레, 간, 콩팥, 염통을 「上堂」에 바치고 뒷발은 산신당에 바친다. (모두 생채로 바친다.) 제사는 그 이튿날(보름날) 자정에 올리는데 상차림은 비봉산 본당 제사와 꼭 같이 한다. 제사 의식과 소지 절차도 마찬가지다. ○ 음복(飮福) 제사를 마치고 아침에 도가(초헌관의 집)에 돌아와 온 마을사람들을 모이게 하여 음복잔치를 벌인다. 제사의 경과를 알리고 나서 새로운 한 해의 동네일을 의논하고 푸짐하니 제물 음식을 나누며 온 마을이 한자리에서 즐기는 모임으로 마을의 화합 협동을 다지는 즐거운 축제다. |
'그룹명 > 문화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책읽는 소리 (0) | 2014.12.08 |
---|---|
[스크랩] 이육사 일대기 (0) | 2014.12.06 |
[스크랩] 경북 영주(2) :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단종복위운동에 얽힌 이야기 (0) | 2014.11.29 |
백률송순 (0) | 2014.11.28 |
바위에 내린 별들의 이야기-김근혜 (0) | 2014.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