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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성칼럼] 지키지 못한 약속 / 이숙희

테오리아2 2013. 1. 18.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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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딸과 함께 한 달여간 동남아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새로운 풍경을 좋아하는 나는 낯선 도시에서 이국인들의 삶을 엿보고 그들의 문화도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길을 나서니 긴장과 두려움의 연속이었고, 긴 배낭여행은 결코 녹록지가 않았다.

태국에서 캄보디아로 가는 육로는 그 주변이 살벌했다. 벌떼처럼 달려들어 구걸하는 사람의 모습과 택시에 실어놓은 가방을 훔쳐가던 사기꾼에 대한 기억은 배낭여행에 대한 기대보다 세상을 향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곧추세웠다.

이런 나의 두려움과 경계심은 아담이라는 캄보디아 청년을 만나고부터 허물어졌다. 아담은 캄보디아의 교통수단인 툭툭이기사였다. 우리 모녀는 열흘 동안 그의 툭툭이를 타고 앙코르와트를 여행했다. 영어가 서툰 그와 그보다 더 영어가 서툰 내가 언어로 소통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언어 소통이 어렵지 않은 딸보다 보디랭귀지로 대화를 나누는 내가 아담과 더 친해진 것만 봐도 마음은 언어를 초월한다. 그와 나는 코리안 맘이라고 부르고 캄싼(캄보디아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숙해져 서로의 신뢰를 쌓았다. 캄보디아 청년들의 꿈은 한국에서 취업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그의 꿈도 한국행이라고 했다. 나는 많은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하고 있으면서도 늘 인력부족에 시달리는 동생의 사업장을 떠올리며 한국에 돌아가면 아담이 취업을 할 수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귀국해서 알아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외국인의 취업이 간단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취업할 수 있는 인원이 매년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용센터에서는 신청 순서대로 대기자가 엄청났다. 국제전화로 아담에게 국내 취업의 어려움을 알려주고, 해가 바뀌기 전에 다시 캄보디아 여행을 가겠노라 약속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채 해가 바뀌었다. 아담의 낙담은 예상보다 큰 것 같았다.

오늘도 페이스북으로 아담이 쪽지를 보내왔다. 캄보디아에 언제 올 거냐며 날마다 기다리고 있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한 달에 두어 번 보내오는 아담의 쪽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에 가슴이 아리다.

수필가 목성균의 약속이라는 글을 보면 젊은 시절, 산림공무원이었던 그가 어느 늦가을에 산정 오두막집에서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방화선 보수작업을 하기 위해 올라왔던 그는 인부들과 그 집에서 며칠을 묵는다. 일이 끝나고 하산하려는 그를 소년이 가로막았다. 그는 자신의 산림경찰관 작업모와 완장, 호각을 주며 꽃피는 봄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 약속은 갑자기 근무지가 바뀌면서 바쁜 삶에 쫓기느라 까맣게 잊었다. 30여년이 지나서 그가 손자를 보고서야 불현듯 옛날 약속이 생각나 찾아가보지만 소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다만 이듬해 봄, 소년은 인기척이 날 때마다 호각을 불며 달려 나갔다가 시무룩해져 되돌아왔다는 말만 듣게 된다.

우리는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런데 약속이라는 보이지도 않는 말의 실체가 묘하고도 신기하다. 언제라도 연기처럼 날아 가버릴 수 있는 그 말에 기대어 우리는 실존을 확인한다.

이제 약속의 계절이 오고 있다. 서슴지 않고 마구 쏟아내는 약속은 유토피아가 따로 없다. 그러나 지키지 못한 약속은 서로에게 아픔으로 남는다. 앞의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지켜지지 않는 약속도 이토록 가슴이 아픈데 나라를 건 약속은 오죽하랴. 대중 앞에 나선 사람들은 무엇보다 신뢰가 생존의 동력이다. 그러니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아예 꺼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이숙희 수필가·계간 수필세계 발행인

출처 : 수필세계
글쓴이 : 최해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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